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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의 작품 중 자화상은 정면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혁신적입니다.
공재 이전에 정면상을 그린 작품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너무도 드문 일이었지요.
그와 달리 그의 손자인 윤용은 인물의 뒷모습을 그려 새로운 화풍을 선보입니다.
인물의 정면상과 뒷면상, 조선 회화사에서 결코 작지 않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그림은 해남윤씨가의 학풍이 만들어낸 결과였지요.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학풍은 고산 윤선도로부터 시작됩니다. 윤선도는 아녀자들의 글로 치부되었던 한글로 시를 지은 인물입니다. 16세기 조선사회에서 너무도 혁신적인 일이었지요. 고산의 학풍은 공재로 이어집니다. 공재는 조선사회에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문인화가입니다.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최초 선보였고 우리나라에 사실주의 화풍도 개척한 이입니다. 그의 화풍은 아들과 손자로 이어집니다.
그림은 평면의 틀 위에서 펼쳐지는 작은 세계입니다.
평면이 가지고 있는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화가들은 원근법과 명암을 넣어 입체감을 살리려 노력하지요.
특히 인물화는 평면의 틀에서 입체감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화가들은 인물을 그릴 때 완전한 정면상을 피합니다. 정면상을 통해 공간감과 자신의 내면세계까지 표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공재는 너무도 파격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그립니다. 조선 회회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혁신이었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화면 가득 얼굴만 채우고 머리 부분은 과감히 생략해 버리는, 인물화 구도의 또 다른 파격을 보입니다.
공재는 천재화가였습니다. 정면상은 입체감과 공간감을 갖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에 대신 화면 가득 얼굴을 채워 넣고 수염 한 올 한 올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표현해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지요. 그래서 공재 자화상은 보는 순간 머리에 각인돼 버리는 마력을 갖게 됩니다. 파격적인 구도 때문이지요.
자신을 정면으로 그것도 화면 가득히 표현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자아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그가 정말로 자아가 높았던 인물, 자신을 너무도 사랑했던 인물, 자존감이 대단했던 인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사랑했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만이 남도 그만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의 삶이 담긴 풍속화를 화폭에 담아내지요.
자신의 내면세계를 너무도 처절하게 표현한 공재 자화상은 관람자에게 숙연함마저 들게 합니다.
공재가 인물의 정면상과 얼굴만을 그려 새로운 화풍을 선보였다면 그의 손자인 윤용은 조선 회화사에서 찾아보기 드문 인물의 뒷모습을 그립니다. 관람자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작품 속 여인, 비록 그녀의 표정은 볼 수 없지만 우린 꿈을 꾸듯 그녀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갖게 됩니다.
이른 봄 농촌의 젊은 새댁이 나물을 캐기 위해 들녘에 나왔습니다.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관람자인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작품 속 여인과 함께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공유하지요.
사람의 뒷모습은 많은 의미와 함축미를 갖습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에 동경과 여운을 갖게 되지요.
윤용은 공재의 손자입니다. 우리나라 풍속화의 시원을 연 할아버지에 이어 그도 풍속화를 남깁니다. 또한 할아버지인 공재와 같은 제목인 나물캐는 여인을 남기지요. 그러나 윤용의 나물캐는 여인은 공재 작품과 느낌이 너무 다릅니다. 공재의 나물캐는 여인은 매우 정적이고 주변에 풍경을 넣어 산수화 느낌을 주지요. 그러나 윤용의 작품에선 조선 여인의 강단함이 느껴집니다. 또한 주변 배경을 완전히 생략함으로써 인물만을 도드라지게 표현했습니다. 윤용의 나물캐는 여인은 원근법도 주변배경도 없습니다. 그러나 입체감이 없어도 그녀의 뒷모습과 시선을 통해 이 작품은 원근감과 깊이감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윤용도 공재처럼 백성들의 삶을 사랑했고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나 봅니다. 힘이 들어간 호미를 든 손. 근육으로 뭉쳐진 다리, 구리빛 살결, 머리에 수건을 쓰고 치마를 걷어 올려 질끈 동여맨 여인의 모습은 건강미 넘치는 조선의 여인상입니다.
공재도 그랬고 손자인 윤용도 그랬습니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해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합니다. 공재는 48세 때, 윤용은 33세 때 세상을 떠나지요. 33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윤용은 할아버지인 공재가 일궜던 풍속화와 남종화풍을 충실히 따릅니다.
해남윤씨가의 화풍은 한마디로 혁신성에 있습니다. 시대를 뛰어넘은 화풍, 그림을 통해 시대의 변혁을 꿈꿨던 화가들이었습니다.
공재 자화상은 해남읍 연동 고산 유물전시관에, 윤용의 나물캐는 여인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해남우리신문
wonmok76@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