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영신출신 족대표 33인 민중 유일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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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33인 민족대표 중 유일한 호남 사람이자 옥중에서 사망한 지강 양한묵 선생 생가복원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해남군은 지난해 1800여만원을 들여 지강 선생 생가복원사업 용역을 실시했었다. 용역에는 생가복원과 함께 지강 선생이 공부했던 소심제와 뒷산 등을 묶어 성역화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한 용역사업은 5개년 계획으로 내년에 시작해 2015년까지 연차적으로 개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옥천면 영신리에 들어설 생가복원사업에 대해 전남도가 화순군에서도 지강 선생과 관련된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옥천 영신주민들은 지강 선생이 화순군에서 3년 정도 기거를 했지만 엄연한 영신리 출신이고 그 후손들도 기거하고 있다며, 지역후손들에게 애국정신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생가복원사업이 이뤄져야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 영신리 주민들은 지강은 33인 애국지사 중 마지막까지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옥사한 유일한 인물이고 해남을 대표할 애국지사이기에 그 같은 인물을 기리는 생가복원은 해남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라고 말했다.
제주양씨 문중에서도 일본으로부터 조국을 구한 명량해전과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정운 장군을 기린 옥천면 대산리 충절사와 함께 지강 생가도 해남 대표적인 애국의 산실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한묵 선생 생가복원사업 용역까지 마친 해남군도 지강 선생의 생가복원은 한 애국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잇는다는 것과 함께 충절의 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이 크기에 생가복원사업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군은 전남도와 보훈청을 상대로 국비확보에 나설 계획이라며 이를 위해 옥천 주민들과 제주양씨 문중과 협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강은 1862년 옥천면 영신리에서 한학자 양상태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신리 제주양씨 문각 소심제에서 한문을 익힌 그는 31세 때 화순 능주의 세무관리인 탁지부사를 지낸다. 이때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을 구제하는 일에 적극 나서고 3년 뒤  일본으로 건너가 민족주의자 손병희를 만나면서 천도교에 입교한다. 천도교 내에 교리강습소를 열어 독립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했던 그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와 보성중학교, 동덕여학교 등 근대교육기관의 경영에 참여, 교육운동에 투신하다 3·1운동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다.
일본경찰에 체포된 그는 전기고문 등으로 투옥 2개월 보름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옥천면 영신리에는 지강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박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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