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에 서면 언제나 그렇듯이 옷깃을 여미고 발걸음 소리도 죽이며 걷는다.
오늘은 유난히 청명한 가을빛이, 떨어진 낙엽위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내려앉는 조용한 오후다.
나는 여느 때처럼 현충원에서 가장 높고 중앙에 위치한 ‘제1장군묘역’에 서서 사방을 둘러본다.
멀리 보이는 한강물은 여전한데 묘지를 덮고 있는 푸른빛을 잃은 누런 잔디가 스산하다. 조금은 싸늘한 묘비를 어루만지며 새겨진 사연들을 천천히 읽어 본다.
전사, 순직, 병사, 별세.
이런저런 죽음의 사연 앞에 나는 문득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고교시절 뜨거운 내 가슴에 화살처럼 박혔던 호우머 시 한 구절을 읊조려 본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숲길로 들어선다.
무성했던 나뭇잎은 낙엽되어 바람결에 저만치 앞장서서 굴러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직도 조락의 계절임을 모르며 산다.
혹은 우수수 지는 나뭇잎을 서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만산홍엽을 바라보며 두 손 들어 환호한다.
가을을 맞는 사람들의 모습은 왜 이처럼 제 각각일까?
이는 사물의 본질과 형상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가을이 주는 계절 탓이리라.
잎이나 열매가 형상이라면 땅에 묻혀 있는 뿌리는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보이는 잎과 열매는 보이지 않는 뿌리의 형상이요, 보이지 않는 뿌리는 빛 고운 잎과 빨갛게 익은 열매의 본질임을 가을에는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걷는 사이 여기저기서 지난여름 태풍 곤파스로 넘어진 아름드리 소나무의 잔형을 본다. 거미줄 모양의 뿌리가 드러난, 밑둥만 남겨놓고 절단하여 가지런히 쌓아놓은 원목 무더기에서 생과 사의 간극을 본다. 산 나무는 서 있고 죽은 나무는 누워 있다.
나무는 사람이 베지 않는 한 백년이고 천년이고 천명을 다한 뒤에 흙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나무 너의 생사마저 자연의 힘과 조화에 속수무책인가. 갑작스런 산책객의 웃음소리에 놀라 돌아설 때 금빛 주화 한 잎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한다.
누가 가을을 충만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현충원에서 바라보는 파란 가을하늘은 너무 서러워 눈물이 난다.
윤욱하(재경향우)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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