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식(삼산면 농암리 )


푸르렀던 나무들이 잎 떨구어 겨울채비를 끝낸 후, 이처럼 세밑이 다가오면 이 해도 별 한일 없이 세월만 삭였구나 하는 허망함과 아쉬움, 정다웠던 분들과의 못 만남이 그리움이 되어 가슴이 아려온다.
특히 30~40년 전에 하늘나라 가신 아버님, 어머님에 대한 죄송함으로 회한에 남고, 끔찍이도 나를 사랑해 주셨던 이용석 선생님이 생각나면 나도 몰래 눈가에 이슬이 고인다.
50여년의 시공을 넘어 그때의 일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졸업식이 가까워오는 어느 날 저녁, 선생님을 따라간 저에게 선생님은 동악이란 호를 내려주시면서 동악이란 글자의 뜻을 풀이해 주셨다.
그리고 연이어 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말씀이시라며 세상에서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세상에서 있으나마나 한 사람, 세상에서 꼭 있어야 할 사람의 세 종류의 인간 중 너는 어느 쪽의 사람이 되어야겠느냐고 물으셨다.
졸업 후 풍진세상에서 아무리 어려운 여건에 임하더라도 이 말 명심하고 열심히 살아가라고 조용히 당부하시던 선생님. 특히 너의 성격은 외완내급이니 항상 너그럽게 행동하라고 하셨다.
당시에 선생님과 마주앉은 밥상 앞에는 해남서국민학교에 다니는 선생님의 아드님이 있었다.
그때의 그 어린이가 10여년 전에 광주지방검찰청 해남지청장으로 부임해왔다는 얘기와 선생님의 안부를 간접적으로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에 당장 달려가고픈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선
생님께서 나에게 바라고 계실 청출어람은 고사하고 신산한 삶속에서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나의 근황을 아신다면, 선생님 마음이 괜히 아프시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선생님과 내가 가까워진 계기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조그만 사건 때문이었다.
검정두루마기의 단아한 모습으로 강의하시는 선생님 수업시간에 장난을 쳤던 우리 급우 세 명은 수업이 끝나자 교무실로 가 잘못을 빌었다.
그때 선생님은 체벌대신 ‘앞으로 한 시간의 여유를 줄 테니 각자 반성문을 써서 제출해라. 그냥 반성문을 쓰던지 시나 수필이나 소설을 쓰던지 그건 너희들 자유다.’ 그때 나는 낙엽이란 제목의 수필을 써 선생님께 드렸다. 그 이후 선생님은 나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주셨다. 어느 날 아침 조회시간에 1200여명의 전교생 앞에서 자작시를 낭송하게 해 주셨는가 하면 목포 KBS방송국 주최 백일장대회에 참가시키려 추천해 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의 바람과는 반대로 교지인 동백의 편집위원에도 관여치 않고, 심지어 작품 한 점도 제출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자갈길 왕복 40여리를 통학하는 처지의 환경과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초조와 불안이 쌓여서 나도 모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저항했던 모양이다. 선생님! ‘나이 들어 퇴직하면 조그마한 과수원 하나 만들어 나무 가꾸면서 조용한 음악을 들으면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 라고 하시던 소박한 꿈은 이뤄지셨는지요.
선생님! 정말 한없이 불러 보고 싶은 이름입니다. 뒤틀린 여정에서 소망하는 나의 별을 아직 찾지도 못하고 허우적이는 현실이지만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꿈 많고 치기어린 18세 소년의 조그만 행복에 젖어든답니다. 선생님 내내 강건하시길 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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