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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면 청룡리 화원복지회관 마당가엔 해남 유일의 철비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맞배지붕을 한 비각 속에 보존돼 있는 비는 바로 화원사람들을 기근에서 구한 정만석 영세불망비이다.
1795년 을묘년에 정만석이 암행어사로 전라도 땅을 밟았을 때는 100여년 만에 닥친 큰 흉년으로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들의 시체가 길가와 골짜기엔 산처럼 쌓여 나뒹굴었다. 굶주림에 지쳐 집을 떠나 밥을 구걸하며 떠도는 사람들이 많아 고을의 반은 빈집들이었다. 이때 화원을 지나던 암행어사 정만석이 구휼미 300석을 내주어 기근을 면하게 하고, 당시 구휼을 제대로 하지 못한 해남현감을 파직했다.
이에 백성들이 감동해 집집마다 수저와 젓가락, 쇠붙이 등을 모아 정만석영세불망비를 세웠던 것이 지금에 전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쇠붙이가 필요했던 일제에겐 이 철비 또한 그저 쇠붙이에 지나지 않았다. 화원 노인회 강두해(81)이사는 “당시 10여개의 철비가 세워져 있었지만, 화원 주민들이 정어사비만은 목숨을 걸고 지켜냈다”고 회고했다. 또한 화원노인회 부회장 주수원(80)씨는 “정어사의 공이 지대해 집집마다 정성을 모아 철비를 제작하기로 했다”고 화원에 전해온다고 말했다. 화원 사람들에게 정만석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이것만으로도 짐작이 간다.
정만석은 조선 후기(1758~1834) 문신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성보(成甫), 호는 과재(果齋)·죽간(竹磵)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였던 정기안(基安)이었다. 1783년(정조7) 생원시와 증광문과에 합격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됐고 성균관전적·병조참의 등을 역임한 후 1794년 호남·호서 암행어사로 파견됐다. 그 후 병조·공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한 후 1829년 우의정에 올랐다. 성실하고 청렴한 관리로 알려진 그는 암행어사와 도백을 거치면서 여러 번 치적을 올렸는데, 당시에 일을 맡길 만한 신하로 그보다 뛰어난 이가 드물었다고 전한다.
그동안 화원주민들은 이 비에 제사를 모셔왔으나, 20여 년 전부터 온양정씨 후손들이 봄 시제 때 제를 모시고 있다. 이 비는 현재 화원면이 관리하고 있는데, 화원노인회에서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며 관리하고 있다. 1999년 당시 천동규 면장이 현재의 자리로 비석을 옮겨 비각을 세우고, 곁에 기념비를 세웠다.
지난해엔 최솔씨가 연출한 ‘명량21품 해남군 화원면 정어사비’를 명량대첩제 때 공연하기도 했다.
박태정 기자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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