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으로 떠난 새댁의 가슴 아픈 이야기
무명의 1만 의병들 무덤앞에 다시 서다


앉아 있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습니다. 대문 밖까지 나갔다 다시 집안으로 들어오길 몇 번이나 했는지…. 발에 감각도 없습니다.
남편은 세상과 담을 쌓고 글만 읽은 서생이었습니다.
집안의 궁핍함은 날이 갈수록 더했고 궁핍을 해결해야 할 일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었습니다.
그러한 남편이 집을 나갔습니다. 왜군이 동네에까지 밀려온다는 소리를 듣고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책을 내팽개친 채 집을 나선 것입니다.  
요 며칠 동네가 시끌벅적하다는 사실을 새댁인 나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모였다하면 온통 전쟁 이야기뿐. 옥천 성산 뒷산인 병마산에서 의병들이 모여 전투연습을 하는 것도 곧장 눈에 띄었습니다.
한 달여 전인 9월 16일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이 일본을 크게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기뻐했는데 전쟁은 쉬이 끝나지 않는가 봅니다.
일본군 부대가 곧 해남에 올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나돈 얼마 후 정말로 일본군이 들이닥쳤습니다.
일본군이 옥천 성산방향으로 밀려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남편은 집을 나섰지요. 무기도 없고  싸움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남편이 무슨 용기로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하는지.
모든 조선인들이 일어나 싸우는데 본인도 당연히 싸워야 한다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충이라며, 집에 있던 농기구를 들고 나선 것입니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선 남편은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병치재를 넘어오는 사람도 아예 없습니다.
오늘 새벽 병치재를 가득 메웠던 하얀색의 인파와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남편을 떠나보내며 나도 그 물결을 봤었지요.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왔을까. 끝없는 물결들이 병치재를 넘어 옥천 성산으로 향했습니다. 두건을 쓴 아낙네들의 안타까운 모습도 보였습니다. 전쟁터로 떠나는 식구들을 망연히 지켜볼 뿐 소리내어  흐느끼는 아낙들은 없었습니다.
그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순간 우리에게 흐르는 감정은 동일했을 것입니다. 이 땅은 우리 것이라는 것, 우리가 살아야 하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야할 땅이라는 것, 그래서 흐르는 눈물을 소리 없이 말리며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침이 가고 낮이 지나고 새벽이 왔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합니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전쟁이 일어난 옥천 성산들녘으로 향합니다. 달빛에 의지하며 길을 걷습니다. 적막을 헤치며 다가간 성산뜰, 뿌연 달빛 속에 비친 들녘이 온통 하얀색입니다. 10월의 들녘이 이렇게 하얗다니. 그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하얀색을 봤을 뿐인데 가슴이 방망이질 칩니다. 하얀 옷을 입은 시신들. 전 세계 유일하게 전 백성이 하얀색만 입는 조선인들. 그들만이 만들 수 있는 들녘의 색이었지요.
그렇게 조선 의병들은 죽어있었습니다. 그 숱한 죽음 앞에서 무서움이란 현실을 직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요. 신들린 사람마냥 시신들을 들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딘가에 있을 남편을 찾기 위해.  
그 많은 시간동안, 얼마나 똑같은 행위를 반복했는지. 먼동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한 시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손이 떨리고 몸이 떨려왔습니다. 집으로 데려 가야합니다. 이 추운 들판에서 종일 있었을 남편, 싸늘한 추위가 몰려오는 10월 10일 밤을 남편은 종일 이렇게 누워있었을 것입니다. 평소 뼈만 앙상했던 남편,
그러나 그 시신을 옮기려 하니 감당이 안 됩니다. 남편의 혼만이라도 챙기기로 했습니다. 주변에 버려진 칼을 들어 남편의 목을 벱니다.
숨을 삼키고 울음을 삼키고 남편의 소중한 머리를 치마로 감싸 안고 집으로 향합니다. 죽은 시신의 목을 베고 코를 베는 일본군으로부터 남편의 온전한 목을 지켰다는 안도감을 안고서 말입니다.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에서 강진군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병치재에서 살았던 유씨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1597년 10월 10일 옥천면 성산리 들녘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일본군은 정예부대 3만 명,  의병이 주축인 조선군은 1만 명. 일본군 입장에서 봤을 때 어처구니없는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조총과 전투복으로 무장한 3만 일본군 앞에, 조잡한 농기를 들고 그것도 무명옷을 입고 전투 대열이 무엇인지도 모른 농사꾼들이 서 있으니 웃음만 나왔겠지요.
수십 년간 전쟁터에서만 살아온 일본 전국시대 무사들에게 이러한 군사들은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끈질긴 조선인들, 임금도 떠난 나라를 지키겠다고 무작정 나서는 무지렁이 백성들, 그러한 의병들 때문에 숱한 고전을 했던 일본군이었습니다.
그 의병들이 이 시골 벽지에서 또 등장한 것입니다.
옥천 성산뜰 전쟁의 일본 장수는 소서행장이었습니다. 남원성과 진주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키운 장수였고 조선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장수였지요. 일본으로 퇴각하던 중 뜻하지 않게 옥천 성산에서 의병을 만나게 된 소서행장 부대는 이 전투에서 패합니다.
물론 소서행장은 일본으로 무사히 퇴각하지만요. 이후 소서행장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전국 재패를 노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참수를 당하고 말지요.  
옥천 성산뜰 의병전쟁은 윤현 윤검 형제와 윤륜 윤신 형제가 합류하면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투에 참여했던 의병 대부분은 사망합니다.
그들의 시신을 한데 모아 합장한 것이 만의총입니다. 예전에는 6기가 옥천 들녘 여기저기에 있었는데 경지정리로 인해 지금은 3기만 남아있습니다.
몇 년전 만의총 발굴조사가 이뤄졌지요. 발굴결과 삼국시대 때 바다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이곳 지배자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고대의 무덤 위에 임진왜란 때 사망한 의병들을 합장한 듯 하다는 의견이 제시됐구요.
무명의 묘지, 그것도 1만명 의병들의 무덤. 유명한 장수들에 비해 전혀 조명을 받지 못한 무덤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서면 더욱 숙연해집니다.
평생 조명받지 못한 삶, 죽음도 빛을 보지 못하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는 존재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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