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강 양한묵.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명이자 일제에 체포돼 유일하게 감옥에서 죽임을 당한 이가 바로 옥천면 영신 출신인 양한묵이다.
지강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을 이끈 33인 중에서 유일한 호남인이기도 하다.
56세 때 감옥에서 죽음을 맞기까지 그의 전 생애는 항일과 독립운동에 매진한 삶이었다.
지강은 1862년 옥천면 영신리에서 한학자 양상태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7살에 천자문을 익힐 정도로 총명했던 그는 영신리  제주양씨 문각 소심재에서 한문을 익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세 때 그는 화순 능주의 세무관리인 탁지부사라는 벼슬을 얻게 되는데 재직 시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다.
당시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이들은 정부군에 밀려 화순으로 퇴각해 오는데 이때 지강은 정부군으로부터 이들을 구제하는 일에 적극 나서게 된다. 그리고 3년 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민족주의자 손병희를 만나면서 천도교에 입교한다.
천도교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그는 이준 등과 함께 공진회를 조직해 친일조직인 일진회에 맞서고 이후 헌정연구회를 결성해 반일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다 이준이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돼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통곡의 눈물을 흘린다.
천도교 내에 교리강습소를 열어 독립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했던 그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와 보성중학교, 동덕여학교 등 근대교육기관의 인수와 경영에 참여, 교육운동에 투신한다. 그리고 1919년 3월1일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다.
일본경찰에 체포된 그의 옥바라지는 작은 아들인 재완이 맡는다. 아들 재완이 면회 갔을 때마다 지강은 전기고문 등으로 식사를 못할 정도로 몸이 많이 상해있었으나 언제나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투옥된 후 2개월 보름이 지난 5월 26일 지강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지강이 옥사하자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동지들은 그를 서울 수천리에 안장한다. 3년 후 지강의 묘는 화순읍 앵남봉으로 이장하게 되는데 그의 이장행렬에는 괭이를 맨 농부에서부터 아이를 업은 노파까지 참여해 그야말로 어두운 조국의 현실을 통곡하는 장이었다고 한다.
지강의 옥사 후 그의 집안은 너무도 큰 풍파를 겪게 된다. 장남인 재규는 탄압을 피해 보성군 득량면으로 숨지만 그의 은신처를 알게 된 경찰들은 그의 아들 대까지 끊임없는 탄압을 가한다. 지강의 옥바라지를 했던 둘째아들 재완은 아버지 사인규명을 외치다 불귀의 객이 되고 셋째아들 재림도 일본 헌병에 맞아 시름시름 앓다 죽음을 맞는다.
옥천면 영신리에는 지강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해남군에서는 지강의 애국정신을 잇기 위해 그가 태어나고 공부한 영신리 생가와 소심재 등을 성역화하기 위한 기념사업을 추진한다. 박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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