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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기상에 PT체조와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등의 고된 훈련의 연속이었던 송호수련장에서의 적응 훈련 기간을 거쳐 드디어 바다로 나갔다. 9일째 되던 날 항해학 강의가 시작됐다. 처음엔 ‘내 꿈이 항해사도 아닌데 이런 걸 왜 배우나.’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강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배가 만들어지고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고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무역을 통한 강력한 해상왕국을 건설했다는 이야기들이 영화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선박기술과 항해술 등이 내 내면의 자부심을 일깨웠다.
11일째 되던 날 독도를 방문했다. 일본 의원들의 독도 방문 시도가 있었던 무렵이라 그 어느 때보다 독도에 대한 감회가 새로웠다. 괭이갈매기와 독도수호천사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독도를 배경으로 일출을 보며 손바닥을 현수막에 찍어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독도퍼포먼스까지 벌였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국내 항해가 끝나고 잠시 집에 들렀다. 엄마는 선상무지개학교 인터넷 카페를 통해 우리들의 활동 모습을 쭉 보고 계셨다고 했다. 국제항해가 시작되던 날 훌쩍이는 엄마를 뒤로 하고 새유달호에 승선했다. 마음이 아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빗줄기에 섞여 내 얼굴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17일째 중국 위해에 발을 내딛고 장보고 유적지인 적산법화원을 올랐다. 안내판에 한국어가 보였다. 머나먼 외국에서 한글을 접하고 보니 반갑기도 하고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적산법화원은 장보고가 당나라에 머물던 시절에 많은 돈을 들여 세운 사찰이라는데 거대한 불상의 규모와 끝없는 계단이 우리 민족의 자존심처럼 버티고 있었다.
22일째는 광복절이었다. 장만채 교육감님과
윤욱하(재경향우)
기 고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태극기를 들고 광복절 기념으로 만세삼창을 불렀다.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의 피를 받은 나, 한국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럽고 가슴이 벅찼다.
24일째 출렁거리는 바다, 꼭 바이킹을 타는 것 같다. 모두가 배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나가사키에 도착하기 전 바다 한가운데에서 돌고래 떼가 나타났다. 그나마 배멀미를 잠시 잊게 해주었다. 일본에서는 원폭 투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원폭 투하 지점에 만든 공원을 갔다. 한순간 아수라장이 됐을 당시를 생각해 보았다. 침략주의가 치러내야 했던 엄청난 죄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은 일본속의 네덜란드라고 불리는 하우스텐보스에 갔다. 동생에게 줄 선물로 미피 인형 가격을 봤더니 1만8730엔 우리 돈으로 20만원이 넘는 액수였다. 일본의 비싼 물가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마지막 항해를 끝마치고 드디어 한국 땅에 도착했다. 항구에서 우리를 마중 나온 엄마 아빠들을 보며 씩씩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유난히 튀는 노랑머리 우리 엄마가 한눈에 쏘옥 들어왔다.
대강당에 모여 4주간의 수료식을 하며 메달을 받았다. 지난날이 뇌리를 스친다. 그림도 그려주고, 좋은 글도 써주고…. 눈물이 났다. 하나, 둘, 모두 울었다.
모두에게 감사한다. 레이디퍼스트라며 모든 일에 양보해준 우리반(7반) 아이들, 그리고 친절히 지도해준 선생님들 모두 보고 싶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경험해서 미래의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라며 선상무지개학교에 입학시켜주신 장만채 교육감님께 정말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교장, 교감, 담임, 부담임 선생님, 장학사님, 저희들 건강하게 잘 보살펴 주신 덕분에 재미있고 의미 있는 여름학교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해남에서 전남에서 대한민국에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마를 걷게 해 주신 것 정말 감사드립니다.
손녀가 캠프 간다며 더운 날 남의 밭일 하시고 받아온 품삯을 슬그머니 내 주머니에 넣어주셨던 우리 할머니 마음이 찡하면서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
이제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 넓은 세상을 향해 꿈과 희망을 힘껏 펼치는 이정은이가 되고 싶다. 나와 모든 이를 사랑할 줄 아는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배려하는 삶이 진정 행복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의 꿈은 시골 마을을 돌며 할머니 할아버지 아픈 곳을 돌봐드리는 의사였다. 이제는 우리 마을을 세계에 알려 부자가 되게 하고 모두 편안한 시골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경제 외교관을 꿈꿔본다.
선상무지개 학교를 다녀와서
해남우리신문
wonmok76@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