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산보통학교가 전신
교명도 여섯 번 변경  
학제 3년제에서 시작해 해방 후 6년제




해남동초등학교가 9월1일로 100년이 됐습니다. 100년의 역사동안 배출된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해남동초교를 졸업한 이들은 지역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며 해남의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100년이 된 동초 역사, 긴 역사만큼이나 숱한 변화를 겪으며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100년의 해남동초 역사에는 백년대계를 준비한 이들의 노력과 정신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역사가 그렇듯 해남동초의 역사에도 일본제국주의 통치 시절이라는 아픈 역사가 포함돼 있습니다.
해남동초는 1911년 9월1일 지금의 향교에서 공립해남보통학교로 개교를 합니다. 동초등학교의 시작이지요. 그러나 동초의 전신이 있었습니다. 1908년 설립된 해남미산보통학교이지요.
이 시기는 기울어가는 민족을 지켜나갈 인재를 양성하자는 사학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날 때입니다. 해남에서도 사학운동의 선구자들이 나타나는데 바로 해남 토호였던 황산면 우항리 이참판인 이재량과 해남읍 읍내리 김익준, 해리 만석꾼이었던 민영옥이었습니다. 이들은 지금의 향교에 사립학교인 미산보통학교를 설립합니다. 학생 7명으로 출발한 미산보통학교 초대교장은 이재량이었습니다. 해남 최초로 신학문을 가르친 미산보통학교는 학생들의 나이도 일정치 않았고 학생들은 길게 딴 댕기머리에 두루마기, 짚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1908년 해남에 교육의 백년대계를 꿈꾸며 개교한 미산보통학교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가가 취소됩니다. 일본의 식민정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미산보통학교는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향교 명륜당에서 수업을 계속 진행한 것이지요. 그리고 동일한 장소에 동일한 학생으로 공립해남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 인가를 얻습니다.
이때부터 해남동초는 사립학교가 아닌 공립학교가 되지요. 그러나 교육내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교육 정책이 시작된 것이지요. 교장도 일본인인 청가중지가 부임해왔고 이러한 일본인 교장 체제는 해방전까지 지속됩니다. 환경은 변했어도 배움의 열기는 지속됩니다. 지금도 한국의 교육열하면 세계 최고이듯이 일본제국주의 밑에서도 교육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나 봅니다. 댕기머리에 한복 입고 짚신 신은 학생들이 공립해남보통학교로 몰려들었으니까요.
이때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제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는데 보통학교 수업연한을 4년제로 정하면서 지역실정에 따라 1년을 줄일 수 있도록 합니다. 공립해남보통학교는 해남실정에 맞춰 3년제로 개교합니다. 그러나 1911년 9월에 개교하지만 미산보통학교 학생들을 편입시켰기에 다음해부터 졸업생이 배출됩니다. 미산학교에 입학해 공립해남보통학교에서 졸업한 여학생도 3명 있었는데 김홍금, 박양근, 염주분 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신여성들이었지요. 이와 함께 공립학교로 공식 인가된 공립해남보통학교에 최초 입학한 여학생은 최오복이었다고 합니다. 해남동초교 최초 여학생인 셈이지요.
해남향교에서 개교한 공립해남보통학교는 10회 졸업생까지 배출한 후 1921년 군청 앞에 있었던 객사인 침명관으로 학교를 옮깁니다. 이때 교육제도가 5년제로 바뀌면서 1922년에는 졸업생이 없게 됩니다. 입학생이 늘어나고 학제가 5년제로 바뀌자 학생수도 급격히 늘어납니다. 따라서 객사인 침명관에 교실 두 칸을 증축하고 학교 이름도 해남심상소학교로 개명합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학생수가 계속 늘어나자 새로운 학교부지가 필요하게 됩니다.
따라서 군청 앞 객사에 자리했던 해남심상학교는 25회 졸업생까지 배출하고 1937년 지금의 해남동초 자리로 이전하기에 이릅니다. 학교 이름도 해남해리공립국민학교로 바뀝니다.
백년 앞을 내다봐야 하는 교육, 이때도 해남유지들이 나섭니다. 당시 유지들은 학교 이축기성회를 조직해 기금을 마련합니다. 해남읍 해리 민영욱씨를 비롯해 연동리 윤정현씨 등 10명이 총 2만원의 돈을 마련했고 해남읍 해리 민경호씨는 자신의 땅 1만2488평을 희사합니다. 당시 해리공립국민학교는 12칸의 교실에 민경호씨가 지어준 63평의 강당으로 현대식 학교 모습이었습니다.
1940년대에 이르러 일본의 식민정책은 노골화됩니다. 창씨개명을 요구하고 교육도 일본어만을 강요하게 됩니다. 따라서 1942년 제30회 졸업생들의 명부 대부분은 일본이름으로 표기가 돼 있습니다.
개교부터 해방까지 해남동초의 교장은 일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12대 일본인 교장이 물러가자 1945년 9월 처음으로 한국인 교장이 부임합니다. 제13대 조동규 교장입니다. 1946년 4월 학교 이름도 해남동국민학교로 개칭하고 학제도 6년제로 바뀝니다.
1970년대 이르러 민간인들의 학교 지원사업이 활발히 진행됩니다. 동문들의 도움으로 풍금과 녹음기가 들어오고 최초 기상대도 설치됩니다. 학교 육성회에서는 세종대왕과 이충무공 동상, 각종 동물상들을 세워줍니다. 지금도 해남동초 교정에 있는 동상을 비롯한 동물상, 어린이 헌장탑 등은 모두 동문 및 육성회에서 기증한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당시 육성회장을 맡았던 조정만씨가 있었습니다.
오랜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의 정치를 주창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초등학교로 일제히 변경됩니다. 국민학교 명칭은 일제의 잔재라며 초등학교로 변경하자 해남동국민학교도 1996년 해남동초등학교로 변경되지요.
해남동초는 2000년에 이르러 해남중앙초등학교를 편입합니다. 해남읍 백야리에 위치한 옛 중앙초등학교는 1962년 개교 당시에 해남동초교 분교였습니다. 그러나 학생수 증가로 1964년 중앙국민학교로 승격됐다 2000년에 해남동초 분교로 다시 편입되고 2004년에 폐교가 됩니다.
9월1일 해남동초가 개교 100년을 맞았습니다. 내년 3월에 졸업할 100회 졸업생까지 합하면 2만2677명이 동초에서 동심을 키우며 자랐습니다. 해남동초교를 졸업한 그 많은 동문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회 각지에서 제 몫을 담당하며 나라와 지역,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을 것입니다.
해남동초교 총동창회는 개교 100년을 맞아 해남동초교 백년사를 발간했습니다. 800쪽 분량인 이 책에는 해남동초 역사와 함께 옛 사진과 역대 교장 및 교사, 졸업생 명단까지 정리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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