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선조 30)정유 음력 9월 16일(일곱물, 사리때) 명량해전을 이틀 앞두고 일본수군 200여척은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에서 명량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 수군이나 일본 수군 모두 활발한 첩보활동을 펼치며 전쟁을 준비한다.
난중일기에 보면 임진년에 김중걸과 포로로 잡힌 김해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은 일본의 전황을 이순신에게 알리는 첩보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3척 대 133척의 대결, 세계해전 사상 기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명량해전은 그에 따른 숱한 전설과 설화를 남기고 있다. 전해오는 설화마다 믿어지지 않을 내용이지만 그러한 내용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명량해전이 기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 중에 하나가 어란 이야기다. 어란 이야기는 일본 순사가 남긴 자서전에서 나왔기에 진위 여부에 대한 찬반논란이 뜨겁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란 이야기에 대한 찬반논란을 떠나 전쟁에서 핀 휴머니즘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있다는 제기도 있다.
지난 8월 어란에서 열린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의 포럼에서도 어란 이야기는 참혹한 전쟁에서 휴머니즘을 찾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있다며 찬반 논란을 떠나 문화콘텐츠로 개발할 의미가 있다는 제안이 나왔다.
송지면 어란포에는 여낭이라는 바위가 있다. 여인이 투신한 바위라는 것이다. 그 여인의 시신을 수습해 소나무 아래 묻어주고 묘 앞에 석등을 세워 기렸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전한다.
물론 이때 죽은 여인이 일본왜장을 사랑한 어란 여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순신에게 일본의 전세를 알려준 후 명량해전에서 일본이 대패하고 사랑했던 왜장이 죽자 죄책감에 바다에 투신했다는 것이다.
어란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 나는 일본 순사 사와무라 하찌만다로가 조선 여인의 정조관을 모르는데서 온 이야기라고 본다. 전쟁터에서 남녀간의 애정문제로 보는 것은 조선여인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정조관을 전혀 모르고 쓴 이야기라는 것이다. 만약 어란이라는 여인이 실존 인물이라면 그 여인은 이순신에게 첩보를 전한 후 정조를 잃어 자결했다고 봐야한다.
어란 이야기 사실 여부를 논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어란 이야기를 문화콘텐츠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장성의 홍길동도 실존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지자체가 나서 지역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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