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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희 훈장은 해남읍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에 참가한 후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샛길만을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검거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강훈장의 행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 같아 박종환씨는 3·1절만 되면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말한다.
강 훈장은 글씨가 명필이어서 인근 초상집의 만장 글씨도 직접 썼고 상여에 들어가는 그림도 직접 그렸다. 이런 손재주 때문에 4월 16일 만세 운동 때는 직접 창호지에 그린 태극기를 몸에 지니고 참가했다. 이때 송지면 마봉리 박천홍(1901년 생), 신흥리 김행문(1901년 생)도 동행했다. 만세운동 후 박천홍은 검거되고 경찰의 손길을 피한 강 훈장은 짚신이 다 떨어진 채 맨발로 동네로 들어왔다. 검거된 박천홍은 강 훈장의 처조카로, 고모부인 강 훈장에 대해 끝까지 발설을 하지 않고 자신이 주도한 일이라고 주장해 강 훈장을 지켰다는 말을 이후 자주하곤 했다.
검거된 박천홍은 똑똑한 사람이었고, 얼굴 또한 준수 했으며, 마봉 구장을 다년간 했던 지조 있는 사람이라고 박종환씨는 회상했다.
이런 박천홍이었기에 친일파들과 관계가 매우 불편했고 그러한 이유로 그의 여동생은 일제 말에 친일파들에 의해 정신대로 끌려가게 됐다.
박천홍 자신도 친일파들에게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하고 그의 큰아들은 실종이 되었으며, 둘째 아들은 해방 후 인공치하 2개월간 송지면사무소에서 근무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서 총살을 당하게 된다.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친일파들이 득세하게 되는데, 해남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1946년 11월, 친일파 청산 등을 외치며 일어난 해남추수봉기에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박천홍과 강경희 아들들이 가담하게 된다. 봉기 진압 후 강경희 아들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진도 갈매기섬에서 희생된다.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과 그들 자손이 해방 후 좌익으로 몰려 경찰에 희생당한 근현대사에 나타난 우리 민족 비극의 축소판이 송지 신흥리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박태정 기자/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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