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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그늘도 그렇게 소중하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 비단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입니다.
글쓰기 위해 사무실 창가에 앉아 누렇게 바래지는 나뭇잎을 보는데 행복하다는 느낌이 가슴으로 옵니다.
작은 것도 감사히 여겨지는 것이 참으로 오래간만입니다.
이 가을,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막연하지만 생생하고 절절한 것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내 생을 신나게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것들입니다.
청년시절의 기다림은 어려움이 끝나고 내가 꿈꾸는 날들이 빨리 왔으면 하는 현실적 시련에 대한 위안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어려움이 가고 편안하게 살고픈 소망이 곧 기다림이었습니다. 아이들 키울 때는 “가정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 혼자 편히 좀 살고 싶다!”였습니다.
아이가 크면 자유로워지고 신나게 살 것 같았습니다. 늘 현재에 있지 않고 미래의 장밋빛 날들만 기다렸습니다.
아이들이 다 떠난 지금, 혼자 힘들게 채워가야 하는 시간들만이 남아있습니다. 기다린 날들은 시간만 올 뿐 가슴에 원하는 것은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다린 날 들의 자유보다 그 순간에 함께 있지 못한 후회가 밀려오곤 합니다. 가슴에서 원하는 것들은 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만들어가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떠나보낸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그 시간들의 축복을 그대로 버린 것 같은 안타까움이 듭니다.
제가 만나는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모래놀이 하는 시간을 기다리고 소풍가는 날 기다리고, 체육시간 기다리고, 별 걸 다 기다렸다고 종알댑니다. 기다림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눈이 반짝이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아이들을 보며 이렇게 절절한 기다림도 없이 삶이 흘러가는 것이 맞는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런 삶인지를 생각합니다.
그냥 하루살이처럼 종종거리며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고 내년이면 기억날 것도 없는 날들입니다.
이런 평화로운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으면서 욕심을 내는 제가 보입니다.
이곳 사무실에 둥지를 틀던 3월, 거친 바람에 유리창을 긁어대던 나뭇가지에 잎들이 무성해지고 다시 열매가 열려 축 늘어져 유리창 저 편으로 물러난 것을 봅니다.
벌써 봄과 여름, 가을 이라는 놀라운 계절들을 보았습니다.
아!!! 정말 별일이 없어 감사한 날들입니다.
기다림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발버둥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세월과 함께 흘러가는 것임을 수용하는 일이라 정리해봅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골고루 맛보면서도 그 나름의 맛을 피하지 않고 음미하는 일입니다. 흘러가다 보면 그 모든 것이 행복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믿는 일입니다.
현재를 그윽하게 사는 여유로움을 향유할 수 있는 그런 저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자잘한 부정적 기분에 압도당하지 않고 조그만 행복도 크게 느끼고 자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절절하게 기다리는 것이 없어 삶에 대한 생생함이 떨어져도 그것도 내 삶이라 소중히 하는 저를 기다립니다.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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