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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는 조부 조모가 계시는 대가족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손씨는 어려웠던 60년대에 밥 한술이라도 덜자는 생각으로 17살에 서울로 향했다. 병역을 마치고 결혼도 했다. 그는 중동 붐이 불던 69년에 대림산업의 직원으로 사우디, 이란, 이라크, 리비아 등지에서 5년 동안 가스라인 작업을 했다. 당시 중동의 임금은 서울에 비해 5~6배에 달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 돌아와 나무 장사를 했는데,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때는 서초동이나 가락동 일대 가로수와 거리 진열용 꽃을 납품했다. 그러나 너무 물건을 많이 들여놓은 바람에 다 팔지도 못하고 손해를 봐야 했다.
그 후 89년에는 보일러가게를 차렸지만, 들여놓은 자재를 미처 써먹지도 못하고 5년 만에 또 문을 닫아야 했다. 숫제 중동에서 번 돈 서울에서 다 까먹었다.
고향에서 1년 정도 머리를 식히면서 다음 일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오류동에 생선가게를 차렸다. 경기도 용인에서 야채와 과일 장사를 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었고, 홀로되신 어머니는 거동을 못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걱정이 되자 2년 동안 끈질기게 아내를 설득했다. 7남매 중 장녀였던 아내는 화원이 고향이었지만, 동생들이 모두 서울에 살기 때문에 그들을 떠나 혼자 시골로 내려오는 것에 대해 두려워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부부싸움을 해야 했다.
결국 나 혼자 밥을 해먹더라도 내려간다는 손씨의 말에 아내도 손을 들었다. 처음 귀농을 했을 때 아내는 풀만 만져도 풀독이 올라 두드러기가 났다. 그러나 지금은 농사에 취미를 붙이고 마늘 고추도 심어 도시의 형제들에게 나눠준다. 특히 동네에서는 형제애가 좋기로 소문이 났는데, 명절이나 집안의 행사에는 8남매 부부가 거의 빠짐없이 참석을 한다고 한다.
손씨는 언젠가 돌아갈 곳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생각보다 몇 년이 더 단축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나무에 관심이 많아 농한기인 겨울에는 산에서 사는데 산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고 열리는 느낌이란다. 그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옛날 어른들의 방식대로 느릿느릿 살고 싶다고 말한다.
손씨는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내려왔는데 수족을 못 쓰고 대소변도 못 가리는 어머니를 광주의 양로원에 모신 것이 제일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건강을 회복해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 할 것만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박태정 기자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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