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무소유’의 가르침을 베풀고, 평생 몸으로 살아내셨던 법정 스님이 입적했다. 평소 스님의 가르침대로 마지막 가는 길도 무소유로 가셨다. 성대한 다비식도 하지 말고 사리(舍利)도 찾지 말라 하셨다. 뼛가루는 강원도 암자와 길상사 나무 주변에 뿌려 달라 하셨다. 지금까지 써낸 책은 더 이상 찍지 말고 절판을 하라셨다. 작년에 선종(善終)한 김수환 추기경과도 평소 종교간 벽을 허물고 대화를 나누신 스님의 입적에 천주교도 깊은 애도를 표했다. 종교를 초월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가신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 바위 무덤에 매장되었다. 사흘 후에 평소 그를 추종하던 여인들이 예수의 시신을 보려고 무덤엘 갔다. 그러나 여인들이 목격한 것은 예수의 시신도 아니요 몸도 아니요‘빈 무덤’이었다고 신약의 복음서는 우리에게 전한다. 천사가“왜 살아나신 예수를 무덤에서 찾느냐?”고 다그쳤다. 여인들이 찾던 예수는 이미 부활하여 갈릴리에서 제자들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을 거라 했다. 부활한 예수는 우리에게 뼈 한 조각 남기지 않았지만 그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세상과 소통하고 울림을 주고 있다.
대개 사람은 죽으면 어떤 식으로든 장례를 치르고 그의 살과 뼈를 보전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종교의 스승들을 기리거나 상징하는 사원이나 성전이 생기고 성지순례가 생겨났다. 성지순례를 가서 스승들의 뼈를 만져보거나 얼굴을 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스승의 숨결과 가르침을 되새겨보는 의미를 찾는 셈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성찰해보면 우리의 스승들은 자신의 무덤이나 뼈를 찾으려하거나 보전하지 말고, 가르침과 진리를 보전하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혈통 보전(血統保全)이 아니라 진리 보전(眞理保全)이다!’
흙(자연)에서 온 몸, 흙으로 돌아가야 마땅한 것인데 거기에 매여 있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이 소위 뼈대나 가문(혈통)에 매여 살다보면 진리에 접근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양반사회가 보여주었듯이 시대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라는 망해도 자신의 가문은 번성하고 혈통은 보전시키겠다는 동물의 종족본능과 이기적 혈통본능만 남게 되는 셈이다. 화려한 무덤을 조성하고 온갖 장식물로 치장한들 고인(故人)의 가르침을 되새기지 않는 한 그것은 회칠한 무덤일 뿐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삶의 상징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자식을 두었더라면 아버지인 예수의 후광을 업고 그 자식들이 얼마나 까불고 설쳐댔을까 말이다. 아버지 예수의 무덤을 독점해서 성지순례로 장사를 해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댄 브라운의 소설‘다빈치 코드’는 철저히 예수의 진리와 가르침을 왜곡하고 오해한 셈이다. 내 자식, 내 가문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가족 이기주의가 종교적 신념처럼 굳어버리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가져야 복되다고 가르치는 이 무한탐욕과 영적 타락의 시대에,‘비운다고 하는 생각까지 비우라.’고 가르친 법정 스님의‘무소유’는 우리가 소유해야 할 마지막 소유물이 아닐까. 1976년 4월에 출간된 법정 스님의 책‘무소유’가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무소유’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던 김수환 추기경의 고백처럼 말이다.
사리를 찾지 말고 진리를 찾으라!
저작권자 © 해남우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