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록-(해남항일독립운동 희생자 추모사업위원장)


93년 전인 1919년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지강 양한묵 선생은 우리고장 옥천면 영신리 출신이다.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와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했고 천도교 중앙총부를 결성해 법도사, 직무도사로 활동하다 3․1 민족대표로 참여해 옥사한 이다.
선생은 1902년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등을 만나 동학에 입교하고 우봉도, 법도사, 직무도사가 된 후 교리강습소를 개설하고 노비를 해방시켜주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암 송봉해 선생은 친일파가 득세하는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서 독립유공자 추서를 받지 않겠다고 수상을 거부한 이다.
해남에서 고려의원을 개설하고 인술을 베풀고 제헌국회 의원을 역임했다.
1971년 돌아가신지 28년만인 1999년 김대중 정권에 이르러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해남에도 항일독립만세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났다.
기미년 4월6일 해남장날을 맞아 해남공립보통학교(현 동초등학교) 김규수 학생 등 22명이 주도가 돼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자 군중이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4월11일에는 김동훈이 주도가 돼 시위를 벌이다 강제 해산되었고 주동자 50여명이 체포됐다.
우수영 장날에도 윤인섭, 정유봉, 이상순 등 학생들과 지역유지들이 장터와 선두리 선창가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74명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기미 3․1독립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난 지도 벌써 93년, 조국이 해방된지 67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친일했던 이들과 자손들은 고등교육을 받고 출세의 길로 들어서지만 독립을 외쳤던 이들과 자손들은 목숨을 잃거나 모든 것을 빼앗겼다. 살아남은 이들은 해방 후 친일경찰에 의해 다시 좌익으로 몰리며 죽임을 당한다.
매년 7월 9일 해남 항일독립운동 희생자 추모식이 개최된다. 그들의 원한을 풀어줄 길 없지만 후손으로서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하루를 잡아 이들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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