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험하다 소문나면서 여인네들 발길 이어져 황산 연당·계곡 성진·옥천 화당·오심재 미륵

아들을 원하십니까. 이곳에 가서 빌면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미륵이 해남 여기저기에 서 있습니다.
황산면 연당마을 도로변에는 작은 건물 안에 미륵이 서 있습니다. 얼굴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이 미륵은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소문 때문에 많은 수난을 당합니다. 이 미륵의 코를 긁어 물에 타서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아낙들이 몰래 날카로운 것으로 미륵의 코와 얼굴을 긁었다고 하니까요. 이미 얼굴의 형체가 알 수 없을 정도가 된 이 미륵은 얼굴 한쪽 귀퉁이가 없습니다. 미륵의 더 아픈 수난사는 이렇습니다.
서울 명문가에 학식 높은 벼슬아치가 있었습니다. 돈도 명예도 모두 갖춘 벼슬아치였지만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아들 점지해주는 미륵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속에서 신령이 나타나 우수영으로 가면 길이 있을 것이란 말을 남깁니다. 그 말을 믿은 벼슬아치는 우수영 수사를 자원해 내려옵니다. 얼마 후 다시 신령이 나타나 연꽃마을 앞에 미륵불을 조성하라 했고 대신 남의 돈으로 조성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답니다. 신령의 말을 따랐으면 오죽이나 좋았겠습니까마는 돈이 아까웠던 수사는 마을 유지들에게 미륵을 조성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어찌되었건 미륵불을 조성한 후 10개월 뒤에 수사의 아내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습니다. 아들은 무럭무럭 잘도 자랍니다. 그러나 열 살이 되자 수사의 아들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세상을 뜨고 맙니다.
귀한 아들이 죽게 되자 수사는 연당마을로 쫓아옵니다. 그리고 미륵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며 손에 잡힌 물건으로 미륵의 얼굴을 힘껏 내려칩니다. 이때 미륵의 한쪽 얼굴이 떨어져 나갑니다. 한쪽 얼굴이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도 미륵은 웃고 있습니다. 더욱 화가 난 수사는 하인들에게 미륵을 통째로 뽑아 없애버릴 것을 명합니다. 그러자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자 모두들 놀란 나머지 도망을 치고 맙니다.
아들을 점지해준다는 소문 때문에 수난을 당한 연당마을 미륵과는 달리 사랑을 받은 미륵도 있습니다.
계곡면 성진마을 논 가운데 있는 미륵불입니다. 작은 건물 안에 있는 미륵불은 커다란 바위에 희미하게 부처가 조각돼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은 7대 국회의원을 지낸 민영남씨 부인에게 아들을 점지해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유명해 집니다. 내리 딸만 낳았던 민 국회의원 부인은 이 미륵불에게 지극정성으로 치성을 드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치성을 드린 후 부인은 내리 4명의 아들을 낳게 됩니다. 너무도 고마웠던 부인은 이 미륵불에게 집을 지어주고 관리인까지 뒀다고 합니다.
아들을 점지해준 신령한 미륵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초파일 때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왔고 평상시에도 아들을 점지해달라는 아낙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지금의 미륵당 건물은 몇 해 전 민씨 부인 자제들이 다시 새롭게 조성한 것입니다.
옥천면 화당마을에도 아들을 점지해주는 영험한 미륵이 있습니다. 애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치성을 드리면 반드시 아이를 낳게 해줬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미륵이 수당이기 때문이랍니다.
예전에는 마을 뒤에 암당집이 따로 있어 마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암당이 계곡면으로 옮겨져 지금은 수당만 외롭게 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수당을 당비석이라 부르고 있는데 한 때 비스듬히 쓰러져 있는데도 누구하나 바로 세우는 사람이 없어 방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네 젊은이들이 이유 없이 죽자 마을 사람들은 당비석이 재앙을 준 것이라며 그 즉시 비를 바로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은 마을 옛 공동 샘 옆에 외롭게 홀로 서 있습니다.
해남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잦은 오소재 약수터 옆에 미륵이 서 있습니다. 이 미륵불에도 한때 여인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오직 아들을 낳아야 만이 대접을 받았던 여인들이 이곳에서 치성을 드렸던 것이지요. 아마 이 미륵도 영험하다고 소문이 났나 봅니다.
지금은 남아선호사상이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지요.
인류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아버지들은 자신이 가진 명예와 부를 영원토록 이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들을 선호하기 시작합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아들은 집안의 힘이자 자랑이었고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 같은 현상이었지요. 인류의 시작과 함께 탄생했던 남아선호사상,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유교가 뿌리내리면서 더욱 성행하게 됐는데 그러한 인연으로 해남 여기저기에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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