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산을 오를 때 시간의 촘촘한 그물 속에서 나도, 나무들도 팔다리를 쭉쭉 뻗지 못한 채 굽은 등을 하고 있었지요 그때 산봉우리에서부터 산 아래로 점령군처럼 밀고 내려오는 햇빛군단을 보았지요 그들은 시간의 그물을 둘둘 말아 나갔어요 선명하게 구획을 그어 갈 때 그늘들은 순순히 뉘엿뉘엿한 무늬들을 내어주고 풀려났지요 순식간에 드러나는 산의 내면, 골 깊은 시름마저 깨어났지요 옹이지고 휘어진 무늬들 낭자했지요 냇물을 깨워 어둠의 찌끼를 씻는 소리, 바람을 불러 묻어있는 밤을 터는 소리가 퍼져나갔어요 저들이 씻고 있는 저 밤은 밤새 떨었던 불안일까요 아님 굽이치는 밤에 기대었던 부끄러운 흔적일까요 그때 내 생각 속의 그물을 걷어내면서 몸이 길이 되라는 소리 환했지요 그들이 걷어가는 영원의 그물 속으로 나의 아침은 편입되어 갔지요 내가 마신 알싸한 골짜기 물맛 같은 그리움도 짜깁기되었을지 몰라요.


정영선 시인. 이대 영문과 졸업.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가랑잎 사랑〉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등의 작품이 있으며, 시집으로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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