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마지막 한학자로 일컫는 윤병진(89·황산면 춘정)옹. 유림들은 그를 진정한 선비라고 말한다. 단 하루도 책을 놓지 않고 항상 남의 의견을 존중하며 성을 낼지 모르는 인자한 학자. 단 한 끼의 밥도 자신이 베풀어야하고 각 문중의 일을 해주면서도 수고비를 사양하고 유림들 내에 갈등이 발생했을 때 조정해주는 지역의 정신적 지주, 지역 유림들은 향후 다시 만나기 힘든 선비라며 윤 옹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나타낸다.
90을 바라보는 윤 옹이 지역에 남긴 발자취는 무한히 크다. 윤 옹이 현재 학당장으로 있는 삼호학당은 해남지역에 한순간 만학의 열기를 일으켰던 곳이다. 삼호학당은 윤병진 옹과 고인이 된 박호배씨의 한학 얼과 선비정신을 잇기 위해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1999년에 설립했고 지금도 220여명의 만학도들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윤 옹은 논어와 맹자 등 사서삼경을 가르치며 삼호학당을 전국 유림들의 선진견학지로 성장시켰다.
해남 각 문중의 묘비에는 윤병진 옹의 이름이 죄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문중의 역사를 꾀고 있다 보니 각 문중마다 묘비 내용을 윤 옹에게 부탁해 왔다. 그럴 때마다 흔쾌히 수락했던 윤 옹은 항상 수고비를 사양해 왔고 정 사양키 힘들 때는 간단한 점심식사 비용만 받았다. 또 살림이 녹녹치 못한 문중의 묘비를 자비를 들여 세워주기도 했던 윤옹은 각 문중 족보 발간에도 도움을 줬다. 해남윤씨부터 무안박씨, 원주이씨 등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족보가 없을 정도다.
그의 업적은 1988년에 발간된 해남문헌집에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각 집안과 문중에 남아있는 문헌들을 수집해 한글로 해석해 놓은 해남문헌집을 위해 윤 옹은 3년간 발로 뛰는 학자생활을 했다. 너무도 방대한 작업인데다 시간이 많이 투자된 이 책은 예산이 부족해 인쇄비용은 죄다 윤 옹이 책임졌다. 옛 문헌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있기에 그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단다. 향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해남향교지도 편찬한 윤 옹은 해남문헌집 발간 이후인 1988년 종합사회복지관 내에 사료연구실을 개소해 10년간 자비로 운영했다. 이곳에서 그는 고 박호배 옹과 함께 고문서 문헌해석과 각 문중 문헌수집 및 발간작업 지원 등을 하며 해남사료연구의 메카로 자리매김 시켰다. 이후 1999년에 읍 해리 유림회관 내에 삼호학당이 개설되자 이곳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해남 마지막 한학자인 윤 옹은 6살 때 한문을 접한 후 23세 때 당헌 이영규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한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밤에 한문을 배웠던 윤 옹은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총명한 이로 알려져 있다.
또한 윤 옹은 워낙 해남의 역사에 밝았기에 해남의 근현대사 및 향토사를 연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온화한 성품인 윤 옹은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부인의 대소변을 2~3년간 소리 없이 받아낸 이로도 알려져 있다. 부인의 병수발을 하면서도 사료연구를 계속했고 사무실 출근도 잠깐씩이지만 빠짐없이 했기에 주변 사람들도 그 같은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윤 옹의 업적이 알려지면서 해남군은 2008년 윤 옹에게 군민의 상을 수여했고 지난해에는 황산면민들이 뜻을 모아 춘정리 입구 도로변에 그의 공적비를 건립했다.
유림들은 100명을 만나면 모두 네 말이 맞다고 안아주던, 황희정승 같은 선비인 윤 옹이 연세가 들어 안타깝다며 그의 대를 이를 한학자가 지역에서 나왔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한편 윤 옹은 1952년 지방의원 선거에 면의원에 당선돼 면부의장을 역임했고 성산광산 소장과 목포대동산업조합장, 국사편찬위원, 해남향교 전교를 역임했다.
박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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