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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록(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상임고문)
며칠 후면 한국전쟁 62주년이 된다. 일제강점 36년 치하에서 벗어나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한반도가 미·소 강대국들에 의해 38선으로 분단되었다. 해방직후인 1946년 11월 1일 해남의 13개면에선 1만3000명이 동시에 궐기해 미곡공출반대와 소작농들의 토지분배, 친일경찰 척결 등을 외치는 미군정 반대시위가 일어났다. 미군정은 주모자 600여 명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200여명을 희생시켰고, 나머지 400여명은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시켜 순화교육을 시켰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이 북한에 협조할 것이라는 예단 하에, 이들을 각 지서와 양곡창고 등에 감금한 후 7월 15일 밤 해창항과 어란항에서 강제로 배에 태워 진도 갈매기섬에서 전원 총살해버렸다.
7월 25일경 영광 불갑사 전투에서 인민군에게 패배한 나주경찰은 우슬재를 넘어 해리에 도착해 논밭 매는 농부, 빨래하는 부인, 뒷산으로 피신한 양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총살했다.
해남읍 수성리와 구교리를 거쳐 마산면 장성리에 도달한 이들의 학살극은 절정을 이뤘다. 화산, 현산, 송지, 북평면을 지나 완도에서 해군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간 나주부대원들은 완도에서도 똑같은 일을 자행했다.
인민군이 해남에 진주한 2개월 동안 마산면 붉은데기, 두드럭재, 산이면 뻔지, 계곡면 월암고개. 화산 해창 계곡, 현산 장고개, 송지 산지목 등은 민간인들의 희생장소였다.
민간인을 총살시키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국제형사법에서는 전쟁 중 점령군에게 일반적인 편의제공은 처벌하지 않고 있다.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약간의 부역정도는 죄로 볼 수 없다는 것이 국제관례이다.
인민군이 해남에 진주한 7월 27일부터 2개월 동안에 간단한 편의를 제공한 사람들이 모함을 받고 손가락질 하나로 처참하게 희생되었다. 70세 이상 국민들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필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큰형과 누나를 잃었다. 부모님은 화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뜨셨기 때문에, 나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독학을 했다.
희생자 유족들의 아픔을 알기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해남군유족회를 창립했었다. 지난 10여년 동안 해남에서 희생된 민간인 희생자의 유족 찾기와 피해자 신청을 위해 노력한 결과 해남은 희생자 379명이 정부로부터 진실규명결정을 받았다. 그리고 나주부대와 보도연맹원 희생사건에 대한 보상길도 열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역혐의로 희생된 사건은 보상 길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겪고 있다. 배상시효경과로 인한 아픔이다. 특별법 제정만이 부역혐의자 희생사건에 대한 보상길이 열린다. 특별법 제정을 위해 모든 유족들이 뛰어야 한다.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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