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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남주(목포대 교수)
옥매산(玉埋山)은 황산면과 문내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특별한 사연을 담고 있다. 붉은 빛 돌들이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이 유별나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온다. 사실은 광산개발로 깎이고 헐벗은 아픔의 흔적으로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최고 높이도 173.9m이였으나 봉우리 부분 20여m가 깎이자 어깨 능선 168m가 정상으로 변했다.
『대동여지도』에서는 옥매산(玉梅山),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매옥산(埋玉山)이라 했으며 ‘화반석(華班石)이 나온다’는 기록으로 보아 붉은 옥을 화반석이라 했고 초선 초에도 옥을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옥매산은 조선시대 전라우수영에 딸린 봉산(封山)으로 소나무를 공급하는 국유지였다. 1903년 무렵, 지금의 신안군과 진도군 지역을 아우르는 옥산군(玉山郡)을 전라우수영에다 설치하고 군청 관아를 짓는데 필요한 목재는 옥매산 소나무를 이용하려 한 적이 있다.
조선시대 옥매산은 소나무가 울창했고, 산림이 우거져 호랑이가 살 정도였다. 옥매산제를 지냈다는 용샘 위에 호랑이 굴이 있는데, 19세기 옥동마을 김순하가 호랑이를 잡아 어머니의 원한을 갚은 곳이다.
물맛이 좋아 전라우수영 우수사가 먹었다는 참샘도 있고, 옥매산은 용의 형국으로 기우제를 지낸 곳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때는 왜선의 동태를 감시하고, 강강술래를 했다는 설화 등이 전하는 명산(名山)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32년 무렵, 옥매산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수탈기지로 전환되면서 옥매산의 아픔은 시작되었다. 일제에 의해 전투기 제조에 필요한 알루미늄의 원석인 명반석 광산으로 개발된 것이다.
명반석은 일본에서는 나지 않는 귀한 광물이다. 매장량은 2000만 톤 이상으로 당시 일본 소비량 200년 정도를 공급할 수 있는 물량이었다.
일본 식마(飾磨)화학공업주식회사에서 채굴해 알루미늄을 제조하였는데, 명반석 13톤에서 알루미늄 1톤을 추출하였다. 이런 목적에 따라 옥매산 광산은 대대적으로 개발되었는데, 1933년 여름 작업인부 3명의 낙뢰사고는 본격적으로 광산이 개발되었음을 알려준다. 최대 1200여 명의 광부들이 일했다. 광부들의 대부분은 옥매산 인근 마을 사람들이었다.
옥매산에서 채석한 명반석은 공중선로를 통해 떡봉산 남쪽 선창까지 옮겨졌다가 선박을 이용 다시 일본으로 운송되었다.
그런데 1945년 3월, 광부들은 강제로 제주도 모슬포로 끌려가 방공호 등 군사시설 굴착에 동원되었다. 해방이 되자 8월 20일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추자도와 보길도 사이 바다에서 선박에 불이나 225명 중 118명이 수장 당하게 된다. 이 아픔의 단초를 제공한 곳이 바로 옥매산 광산이다.
과거 역사는 잊어야할 것과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옥매산의 역사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면 아픔의 일제역사는 반복될 수도 있다. 금번에 확인된 일제의 쇠말뚝, 흉하게 헐벗은 옥매산과 채석굴, 선창가에 있는 대형콘크리트 광산시설과 부두, 공중선로와 일본 신사 흔적 등 모두가 생생한 수탈역사의 현장으로 국민정신교육장이다.
그 희소가치가 크므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일부 복원·정비한다면 인근 목포시 건축물 중심의 근대유산과 어우러진 경쟁력 있는 상품이 될 것으로 믿는다.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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