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중략)…’
4년 4개월 동안 지속되던 인류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인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의 시인 엘리엇(T.S Eliot)은 ‘황무지(荒蕪地)’라는 시에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시인이 보기에 제국주의의 탐욕과 폭력이 휩쓸고 간 유럽사회는 더 이상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불임(不姙)의 땅, 불모지(不毛地) 그 자체였음에 틀림없다. 100여 년 전이나 오늘이나 희망을 잉태하지 못하고 죽임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인간사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묻게 하는 시로 이해한다.
해마다 꽃피고 새우는 4월을 맞이하면 기억해야 할 수난의 인물과 사건들을 떠올린다. 흑인(노예) 해방자인 링컨 대통령의 죽음(1865녀 4월 19일), 일제 신사참배 반대자 주기철 목사의 옥중순교(1944년 4월 21일), 나치의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던 독일의 본회퍼 목사의 처형(1945년 4월 9일), 인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1968년 4월 4일), 4.19 학생의거(1960년 4월 19일), 양심선언으로 생을 마감한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의 죽음(1975년 4월 11일)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사월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수를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마는 이들에게 사월(四月)은 ‘잔인한 사월(死月)’이 되고 말았던가!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시계는 오늘도 잔인한 4월을 향해 가고 있다.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난 초계함 ‘천안함’의 침몰원인은 고사하고, 선체 인양작업에만 한 달 이상이 걸린다고 하니 생환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가족들의 심사를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남기훈, 김태석상사의 주검을 바라보며,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겠다고 물속에 들어가 순국한 한준호 준위의 영정을 바라보며 삶이 무엇이고 국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이런저런 구실을 들이대며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 장차관들이 어찌 이들에게 ‘훈장’을 추서하며, 꽃을 바칠 수 있으랴! 죽은 사람 영정 앞에서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 없는 한나라당 정치인들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봄은 이렇게도 잔인할 수 있을까, 아니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4월이면 앞 다투어 피는 꽃이 어디 한 둘이랴마는 꽃은 피(血)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꽃이 피었다고 하지 않았을까. 생명이 피어나는 계절, 봄에 식물이 흘리는 피의 색깔은 다양하다. 빨강 노랑 파랑 하양 자줏빛 꽃은 그대로 피의 색깔이다. 피가 흐른 자리에 새살이 돋듯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이 땅에 스러져간 수많은 넋들이 흘리고 간 그 자리에 다시 꽃들이 피어난다. 이른바 꽃피(花血)다! 올봄에도 피어나고 있는 꽃피들에게 머리 숙여 묵념을 바친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중략)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산에 언덕에 - 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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