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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시문학은 조선초기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전까지, 해남은 중앙과 거리가 먼 변방의 오지라 유교적 통치가 미치지 않았고, 오히려 대흥사의 영향력 아래 놓여 불교문화의 입김이 더 강하였다. 또한 대몽항쟁군인 삼별초와 자주 출몰하는 왜구의 영향으로 무인의 지배가 견고하여 뛰어난 문인이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고려말엽부터 조선 초기까지 호장(戶長)직을 세습해오던 해남 정씨 가문의 후원으로 드디어 해남에 뛰어난 문인이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후원에 힘입어 해남에 최초로 시학의 뿌리를 내린 사람이 ‘표해록’의 저자 금남 최부였다. 최부가 해남 정씨 가문의 사위가 되어 해남에서 활동하면서 문풍을 몰고 왔고, 윤효정, 임우리, 유계린 등 세 제자를 길러내었다. 윤효정의 아들 귤정 윤구와 유계린의 첫째 아들 유성춘은 호남3걸에 속했을 만큼 뛰어났고, 임우리의 조카 석천 임억령은 ‘호남 시학의 스승’으로 일컬어졌다. 석천 임억령을 필두로 미암 유희춘이나 옥봉 백광훈 같은 시인들이 조선 중기 해남 시문학을 이끌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 이후 등장한 시인이 조선의 으뜸시인이라고 불리우는 고산 윤선도이다. 그는 성정이 곧아 바른 소리를 잘해 정계에서는 쫓겨났지만,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고산의 훌륭한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고산의 문예 혼은 국보급 문화재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그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에게 이어졌다. 윤두서 이후 한동안 해남의 시맥은 끊어졌었는데, 그 시맥을 다시 이은 사람이 ‘동다송’이란 책으로 유명한 초의선사이다. 2년간 서울에 있을 때 14차례나 유생들의 시회에 초대를 받을 만큼 그의 시적 재능은 뛰어났고, 죽기 전까지 수많은 시를 썼다. 그가 활동했던 조선 후기는 실학사상이 널리 퍼져있어, 시보다는 산문이나 소설이 더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자칫 끊어질 수도 있었던 해남의 시맥은 그를 통해 현대 시인들로 이어지게 된다.
이 시인들이 바로 ‘강강술래’로 유명한 이동주와 ‘과목’의 시인 박성룡이다. 이 두 시인은 5,60년대를 풍미했고, 산업화의 70년대를 넘어 광주항쟁이 있던 80년대에 등장한 시인들이 바로 김준태와 김남주, 고정희 그리고 황지우이다. 고등학생인 나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이다. 이들은 한국 시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뛰어난 시인들이다.
시문학사를 비롯하여 해남에 대해 하나 둘씩 알아가면서, 내가 나고 자란 해남이라는 곳에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되고, 내가 해남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참고도서 : 시인의 고향 해남시문학사.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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