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읍 내사리 월교 마을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는 김성래(45)씨는 올해 귀농 16년차이다. 이젠 토박이가 되다시피 했는데, 귀농이란 말이 새삼스럽다는 김씨는 해남에 처음 친환경농법을 전파한 사람이다.
목포기계공고를 졸업한 김 씨는 주변의 권유로 86년 풀무공동체에 들어가 친환경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89년 군 제대 후 현재 토담을 운영하고 있는 매형의 권유로 지학순 주교가 생명운동으로 시작한 소비자와 생산자를 연결해주던 한살림공동체 실무자로 들어가면서 친환경에 눈을 뜨게 됐다. 당시 한살림은 쌀가게 수준이었는데, 김 씨는 이곳에서 95년까지 여러 일을 맡으며 생협소비자 조직을 만들어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안학교인 풀무학교를 나온 김 씨의 부인 또한 한국최초의 친환경생산자조직인 정농회에 발을 들여놓는 이로 오늘까지 친환경 동지로 함께 해오고 있다.
김 씨는 94년 해남에 귀농을 해오게 되는데, 처음 살림을 차렸던 곳은 삼산면 충리 산속이었다. 움막 같은 비닐하우스에서 아이들 기르면서 시작한 살림이 어느덧 어엿한 집과 공장 그리고 2만평의 땅으로 불어났다.
김 씨가 고구마와 인연을 맺은 것은 97년부터이다. 김 씨는 배운 것이 친환경뿐이라 다른 관행 농법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 당시는 밤고구마만 유통이 되던 시절이었는데, 김 씨가 들여와 생산한 고구마는 별 이름도 없는 물고구마였다. 생산한 친환경 고구마를 직거래로 내어놓았는데, 홍보용 이름이 필요했다. 김 씨는 속살이 호박처럼 노란 것에 착안해 호박고구마라고 명명을 했다. 이것이 해남 호박고구마의 시초가 된 것이다.
지금은 친환경이란 말이 일반화된 말이지만, 김 씨가 친환경 농사를 시작하던 때엔 주위의 시선이 차갑기만 했다. 당시 해남에도 두레나 여성민우회 등의 소비자 조직은 있었고, 정농회와 같은 생산자 모임이 있었지만 조직화가 되지 않은 실정이었다. 이에 생산자를 조직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99년에 해남 흙살림을 설립하여 고문역을 맡았다.
김 씨는 일반적인 농산물의 유통 과정을 지켜보며 급식업체에까지 내려오는 6단계를 줄이면 친환경급식도 가능할 것이라는 것에 승부를 걸고 부산지역 학교에 친환경학교급식을 시작했다. 처음 10개 학교로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120개의 학교로 불어났다. 김 씨는 일미식품에 총 납품권을 갖고 쌈무와 단무지무를 공급하고 있다. 또한 영남대 연구기관이 육종해 낸 갈색쌀(일명 수험생쌀)을 일반 농가에 보급하기도 했다. 그는 농업은 한계가 없고, 시장 또한 한계가 없다며 농업은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푸른 빛 농촌 사랑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박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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