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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된 일이냐고 아내에게 물었더니 아내는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불려온 담당 과장은 내게 폭탄선언을 했다. “당신은 평생 휠체어에서 살아야 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죽으려면 혀를 깨물든지, 동맥을 끊는 방법 외엔 없다.”
당시 내가 입원했던 병실은 조대병원 7층이었다. 맘 같아서는 당장 뛰어내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이미 내 의지로 살 수 있는 삶이 아니었다. 아내는 내게 그래도 아이들에겐 당신이 필요하다며, 삶의 의지를 북돋우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죽지 못하고 내 신세를 비관하며 6개월을 살고 난 어느 날이었다. 비로소 내가 아닌 주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내겐 초등학생이던 큰딸에서부터 2개월 된 막내까지 4명의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5년에 걸친 장기 입원이었지만, 병원비는 산재보험으로 해결이 되었고, 생활비는 부모님과 형제들의 신세를 졌다.
돌이켜보면 모두 고마운 사람들이다. 특히 불구가 되어버린 날 끝까지 간호해 주고 격려해 준 아내에게 고맙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장애인복지관 개관 이후이다. 장애인 복지관의 프로그램을 접하면서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내게 끝까지 후원을 하겠다며, 적극적으로 장애인복지관 프로그램에 나갈 것을 종용했다. 처음엔 서예를 배웠다. 그리고 1년 후 서각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장애인 비장애인 구분 없는 큰 대회에 나가 입선도 하고 순천미술대전에서 서각분야 우수상도 받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나에게 서각 작품을 부탁해 왔다.
서각을 접하기 전 늘 움츠리고 짜증만 내던 내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감과 긍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내 삶의 변화는 모두 아내의 내조 덕이었다. 아내는 나의 정신적인 다리가 되어 나를 우뚝 서게 했다. 내게 제2의 삶을 찾아주었다. 내가 장애인이라는 말을 내심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1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다. 현실은 장애인이었지만, 결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꿈만 깨면 다시 멀쩡하게 설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는 완전한 장애인이 된 것 같다. 더 이상 움츠리는 삶은 살지 않을 것이다. 두 다리가 아닌 휠체어로도 똑바로 설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박태정 기자/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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