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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사성 [Epic] 은 신과 인간 영웅의 장대한 행동을 그리는 것으로 본다. 한마디로 인간의 역사적 기록 채취이며 그 사례로 호머의 눈먼 장님 시인이 부르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이다.
서양의 초등생들은 일리아드를 학습하며 문화교양을 쌓는다. 그리고 서사의 전통을 문학의 본류로 여긴다. 근대에는 산문 정신이다. 그러나 오늘의 입장에서 재해석해 보자. ‘일리아드’는 신과 영웅이 하세하여 중동 연안의 트로이 도시를 멸망시키는 과정을 그린 침략 전쟁이다. 그것이 서사성의 정체이다. 침략 전쟁의 영웅이야기이다. 전쟁발단은 희랍의 아름다운 왕비를 트로이 왕자에게 뺏긴 것을 되찾기 원정, 자존심 벌이는 ‘미의 전쟁’이라는데 트로이 종족을 지상에서 사라지게 할만큼한 자존인지 이해가 힘들다.
물론 세계사는 끊임없는 전쟁으로 얼룩진 것이 사실인데 이를 미화시키는 것이 서사성이란 것이다. 그 전통은 로마의 시이저, 알렉산더, 지그필드, 컬럼버스, 나폴레옹, 히틀러, 미 서부개척의 영웅 등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록펠로, 카네기, 포드 같은 재벌로 둔갑한다. 그리고 동양을 침탈하여 마침내 자본주의를 글로벌화 시키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남성 우월주의적 사고가 박혀있다.
그러나 중국에도 인도에도 그 같은 영웅은 없다. 삼국지나 수호전의 등장인물인, 온갖 재주를 부리는 괴물 손오공도 부처의 손바닥 안에서 논다. 동양은 서양식 영웅의 찬양이 아니라 성인과 현자의 풍모를 말하며 존경한다. 노자, 장자, 공자, 석가, 간디 등이다.
최고 권력을 가진 제왕의 자격도 백성의 마음이 자기마음 같을 때이면. 아니면 갈아치운다는 역성혁명의 명분이 있다.
사포의 서정시에 해당하는 것이 중국의 시경이며 당송 시대의 시가이며 우리말 서정 시가이다. 그림으로 말하면 자연을 온축하는 산수화이다. 이보다 오묘하게 자연의 신을 그리는 서정화가 없다. 그 산수안에 성인 현자 도인이 함께 모여 산다. 인간은 속세의 현실에 사는데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을 지향한다. 플라톤의 ‘유토피아’ 왕국에서는 시인은 추방된다. 체재 불만자이니까. 시인이 없는 이상향에서 철학자들은 자연세계를 알 턱이 없다. 알렉산더를 훈육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침략의 영웅을 키우는 것으로 칭송받다니, 웃기는 일이다.
흔한 꽃과 새를 그리고 하나의 풀 포기에 달라붙는 벌레의 생명도 소중히 그리는 마음자세 속에 우주를 담고 있다. 인간이 인간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다. 우리의 서사무가는 ‘바리데기 공주’ 이야기이다. 바리데기는 부모에게 버림받아 들판에 던져지며 온갖 시련의 고초를 겪다가 부모의 병을 완치하는 약을 가지고 돌아온다는 줄거리이다. 효심이 지극한 딸이 서사의 주인공이다. 서사든 서정이든 무당의 자기본심을 신화라고 할 수 있다. 홍성담은 바리데기 설화를 우리의 오방색으로 아찔하게 그린 명작을 남겼으며 황석영은 ‘바리데기’ 소설을 남겼다. 종군위안부로 끌러나간 이들의 희생이 서양을 추종한 일본 제국주의 야만성을 일깨운다.
서양의 서사적 투쟁에서 얻은 소득이라면 체재 극복의 자유 , 산문 정신, 민주화 투쟁이며 그것이 물신 숭배의 지본주의에 숨통트기라 할까? 그럼에도 아직 서양은 우주 자연으로 회귀하지 못한다. 스스로 종말을 자초한다. 좋은 예술인은 서사와 서정을 자유자재로 왕래한다.
우리는 목포의 문학선배 화가들이 보여주는 작품을 보면서 입문시절을 경험하는데, 몹시 가난한 최하림, 정규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거의 독학으로 마스터한 수재인데 그가 내게 역사 인식의 정보를 심어주고 , 야나기, 김수영, 서정주, 김지하 문학을 예리하게 분석 비평한 산문을 읽게 하였다. 또한 그의 짧은 서정시는 새들 노래처럼 아름답다. 김지하도 서정과 산문에 탁월한 작가이다. 내게 ‘행동하는 양심’의 용기를 심어 주었다면 최하림은 삼엄한 전두환 군부정권 시절 민중예술의 예행연습을 위한 비밀 장소를 일년 동안 제공해줘 들불을 지피게 하였다. 참으로 고마웁다.
행동하는 양심은 김대중 선생의 표심을 얻기 위한 술수가 아니라 남도의 서사, 산문정신이다. 그분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미제의 방해책동에도 남북간에 얼어붙은 평화회담의 물꼬를 튼 사실이며 예술을 사랑하여 작품을 매입해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의 김지하 행적은 귀를 닫아 버려 소통을 차단한 모습이다. 너무 유명세를 탄 탓일까. 기가 막혀있다. 나는 그가 쓴 저작물을 전부 사모아 통톡 했는데 원론만 화려하지 각론의 진전, 전개가 없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경제에 문외한이여서 도무지 사상가라고 할 수 없다. 허공에 떠도는 관념, 빈 수레가 요란한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는 그의 정치적 발언과 아무 상관없다,
남도는 풍부한 자연의 자원을 갖고 있다. 이를 관통하는 서사적 산문 정산이 없다면 남도인은 시체나 다름없다. 시체나 다름없는 지성이 전국에 넘쳐 난다. 그 속의 서정시는 알갱이 없는 껍질이며 예술은 사기꾼이 벌이는 장난이다. 그 정도 판별 능력은 나는 갖추었다.
우리는 소펜하워 말처럼 자연이라는 위대한 책에서 무엇을 배울까? 더 이상 큰 스승이 어디 있는가?
나는 지금도 찾고 헤맨다. 문을 두들긴다. 아랫사람에게 배우기를 서슴치 않는다. 공자의 격언처럼.
그 자연 안에 만물간의 평등심과 무소유, 도의, 평화주의가 묻혀 있지 않은가 , 21세기를 향한 , 그리고 오래된 미래의 우리문화 예술이 새롭게 지향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닐까 . 우리 모두 귀를 열어두고 말문을 트고 살자.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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