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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자(唱者)는 소리꾼이다. 고수(鼓手)는 북이나 장구로 소리꾼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사람이다. 얼핏 보면 창자(唱者)가 주역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소리에 맞춰 북을 두드리고 추임새를 넣고 흥을 돋워 주는 고수(鼓手)가 없다면 소리꾼의 소리는 살아날 수 없다. 그래서 판소리에서는 1고수 2명창 이라고 한다. 결국 좋은 소리꾼은 좋은 고수의 조연 없이는 탄생될 수 없는 법이다. 역으로 아무리 좋은 고수가 있다 할지라도 좋은 소리꾼을 만나지 못하면 소리는 소리답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 둘은 하나와 같다.
마찬가지로 영화나 TV 드라마에서도 주연을 빛내주는 이들은 약방의 감초처럼 맛을 내주는 조연들이다. 드라마는 주연과 조연이 있게 마련이고 주연과 조연의 관계와 연기가 시청자들에게 색다른 재미와 색깔을 더해주고 다음 스토리를 기대하게 한다.
아름다운 꽃을 찍고 싶을 때에는 꽃만 찍어서는 별 의미가 없다. 꽃에 살포시 앉아있는 나비나 꿀을 빨고 있는 벌을 한 화면에 넣을 때 꽃의 생기와 아름다움이 돋보이게 된다.
꽃다발 하나를 만들 때에도 장미나 튤립만을 가지고 만들어서는 볼품이 없다. 거기에 안개꽃이라도 장미나 튤립을 살포시 감싸고 있을 때 그 조화로움이 꽃다발의 화려함을 더해준다.
대규모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현악기군과 목관악기군, 금관악기군, 타악기군의 네 가지 악기 군을 갖추고 각각의 악기가 어울려 나오는 하모니가 오케스트라의 매력이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악기 군들의 소리를 조화롭게 만들어 내는 마술사와 같다. 오케스트라가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내려면 모두가 주연이고 모두가 조연이어야만 한다. 결국 그들은 모두가 하나인 셈이다.
하지만 훌륭한 창자(唱者)와 고수(鼓手)가 있고 훌륭한 영화나 드라마 혹은 오케스트라의 환상적인 공연이 있을지라도, 주연과 조연이 있고 꽃과 벌이 조화를 이룬다 할지라도 정작 관객이 없으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조화속의 조화를 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관객이다.
관객은 누구보다 중요하다. 청자(聽者)없는 창자(唱者), 관객 없는 주연, 시청자 없는 영화나 드라마는 무의미하다.
봄이면 오픈을 시작하는 마라톤 주자가 힘든 레이스를 할 수 있는 것도, 물론 목표를 향한 자기와의 싸움이겠지만, 노변(路邊)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군중들과 목마를 때 건네주는 물 한 잔에 힘을 얻고 결승선(finish line)에서 기다리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리라. 사회적 취약계층에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는 이들이 힘을 얻는 것은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요, 신문사의 기자가 고심을 하는 것도 신문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며 학교종이 땡땡땡 울리는 것도 교실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서도 주연과 조연 그리고 관객의 조화로움은 사회를 성숙시키고 국민에게 행복감을 안겨줄 수 있다. 지난 시절 이런 조화로움이 깨어진 불협화음은 아쉬움을 남겨왔다.
새 정부가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라는 국정비전을 표방하고 막을 열었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지간에 이 땅의 주인은 관객처럼 보이는 국민이다. 아무런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촌부이고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 TV앞에 앉아있는 이들이 주인이다. 혹 주인을 착각한 이들이 대의정치의 본질을 망각하고 정체성의 혼란이 있던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국민의 가슴은 잣대와 재판관이 되어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해 왔다. 주인을 주인으로 섬길 때 군중들은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다. 주인이 주인 대접을 받지 못할 때 주인은 분노했다.
우리가 사는 땅끝의 주인 역시 이 땅에서 뿌리를 박고 하루하루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땅끝의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이 평안하고 만족함을 누릴 때 주인의 주인 됨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요 그렇지 못할 때 주인은 주인의 권리를 찾으려 할 것이다.
누가 창자(唱者)이고 누가 고수(鼓手)이던 지간에 창자와 고수는 하나여야만 한다. 주연은 훌륭한 조연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관객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어떤 특정인이나 집단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나 의회나 어떤 관공서나 사업체나 주연과 조연의 정체성, 조화로움, 그리고 관객의 응원이 있을만할 때, 주연과 조연의 차이를 넘어 하나 됨을 지향해 나갈 때, 1고수 2창자의 관계가 하나로 정립될 때에라야만 아름다운 사회가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우리 모두는 주연이요 조연이요 관객인 1인 3역을 해내는 이들임을 잊지 않기로 하자. 우리는 한 몸이라는 의식이 보다 성숙된 주인의식이며 그런 날에 주인의 주인 됨이 실현될 것이다.
헤밍웨이 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명대사 한 줄이 생각난다.
‘어떤 이의 죽음도 나 자신의 소모려니 그건 나도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에, 그러니 묻지 말지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고,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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