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지난 세월을 돌려놓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옛 사진과 신문에 실렸던 기사들을 들춰 보기도 하고 흔적들을 요리조리 챙겨봅니다. 그러다 보면 잊혀진 이야기가 생명을 얻습니다.
수북이 쌓인 사진들 속에서 한 장의 사진에 기억이 머뭅니다.
아마 어느 해 늦가을쯤이었을 것입니다.
그날도 퇴근 후에 버릇처럼 드라이브를 했습니다. 퇴근 후의 드라이브는 일상이었고 그건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의 답답함과 삭막함에서 벗어나 감성을 일깨우고 싶어서였습니다.
드라이브를 하다 마음이 머무는 곳에 발길을 세우곤 했습니다. 논두렁에 앉아 있기도 하고 잔물결이 이는 저수지 가에 앉아 마음을 비우기도 하고 때론 숲속을 거닐기도 하는 것이 퇴근 길 코스였습니다. 그 날도 들판의 모습, 노랑이 더해 가는 산야를 보며 농촌 들길을 달렸습니다.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올망졸망한 촌락들과 삶의 이야기가 보이는 들판의 모습, 아직 코뚜레를 하지 않은 어린 송아지가 엄마소를 따라 다니는 모습들이 연어의 회귀본능처럼 어릴 적 고향 냄새를 되살려 내고 잠들었던 감성을 살려주기에 갔던 길을 또 가곤 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낚시꾼이라도 만나면 괜스레 차를 세우고 “입질 좋나요?”라고 묻는다던지 낚시꾼이 잡아놓은 고기를 들추어 보고 낚시에 미쳐 돌아 다녔던 감정을 느끼기도 하구요.
들녘을 달리다 저수지 옆 풀숲에 세워진 표지판에 눈길이 끌려 차를 세웠습니다. 저수지의 위치가 좋아 낚시꾼들이 자주 앉아 있었던 부근의 풀숲에 세워진 ‘내일도 이 자리에 당신이 머문다면?’ 이란 표지판의 글이 가슴에 닿아서였습니다.
표지판이라야 쑥을 비롯한 잡풀 속에 세워져 있어 주변은 어지럽고, 짐작컨대 마을 청년들이 철로 뼈대를 만들고 하얀 바탕에 검은 페인트로 글씨를 써놓아 약간은 촌스러우며 더군다나 하얀 페인트마저 군데군데 벗겨져 볼품은 없는 데 표지판의 글씨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내일도 이 자리에 당신이 머문다면?’
그 표지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그 글귀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별로 볼품도 없는 표지판에 어깨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선 한 번씩은 훑어보고 지나갔습니다.
삭막한 세상!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표지판이라야 ‘횡단보도’, ‘사망 사고 많은 곳’, 이런 딱딱한 표지판만 보다가 오랜만에 감정이 듬뿍 들어있는 표지판에 나를 담고 싶었습니다.
오늘 그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며 옛 감정을 되살려 봅니다.
‘내일도 이 자리에 당신이 머문다면…’
저수지 가에 세워진 그 표지판은 낚시꾼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에 몸살을 앓는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표지판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 표지판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라든지 ‘내가 버린 쓰레기 내가 책임지는 세상’ 이런 글귀가 쓰였다면 마음에 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표지판이 가슴에 닿았던 것은 표지판이 주는 여운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짧은 문장의 표지판, 다음에 어떤 말이 어어져야만 완성될 것만 같은 아쉬움을 가진 문장의 뒷부분은 일부러 남겨 두었을 것입니다.
오늘 나머지 문장을 이어봅니다.
‘내일도 이 자리에 당신이 머문다면?’ 오늘을 보다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일도 이 자리에 당신이 머문다면?’ 이란 짧은 글귀를 사랑하는 분들에게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침묵이 웅변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미사여귀를 가득 담은 말이나 글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한마디만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고사성어들은 긴 사연들을 짧게 줄여 깊은 지혜를 담은 글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 역시 그런 글들입니다.
우리는 언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홍수에 먹을 물이 없듯이 말이나 글의  홍수 속에도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단맛이 나는 말이나 글들은 드뭅니다. 짧지만 여운을 남기는 말이나 글이 가슴을 살려내는 양약이 아닐지 사진을 들추어보며 생각합니다.
‘내일도 이 자리에 당신이 머문다면?’
늦은 시간,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내일 또 머무를 자리에서 생각의 밤을 소중하게 가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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