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와 구석기 시대가 모권중심 사회이었다는 신화나 유물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현대사회는 여성의 인권이 크게 성장했다.
여성이 혼자 살지언정 남자에게 매어 살지 않겠다는 의식이 팽배한 탓인지 우리 동네만 해도 여자를 서울에 둔 홀아비가 많다. 우선 자급할 토대가 없고 농사가 힘들기 때문에 시골을 기피한다. 어찌 보면 여자에게 의존하든가 아니면 내버림 당하는 세상이다. 점차 석기사회로 돌아감인가?
우선 여성 참정의 이점은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모는 참혹한 전쟁은 적어지리라는 것이다. 역대의 전쟁은 자식을 낳아본 적 없는 남자의 야만성에서 비롯됐다. 남자를 앞지르는 창조적 문화욕구도 상승하리라 본다.
여성의 도전 없이 절로 이루어진 역사는 없다.
남녀차별이 심한 조선왕조 유습이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되던 시절에 남자의 인형이기를 거부한 선각자가 있었다.
나혜석 화가(1896-1948), 한국여성 최초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입학, 서양화 전공, 최초의 여류화가 개인전 등 그야말로 화려한 삶이었지만 성공한 여성으로 살기엔 당시 시대는 그녀를 뒷받침해 주지 않았다.
나혜석의 호는 정월, 본관이 나주이고 수원에서 5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나기정으로 군수를 지낸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덕분에 명문고를 거처 동경여자미술전문대를 졸업하면서 김일엽 같은 자유연애를 즐기는 선각적 여성과 많은 교우를 쌓았다.
형제 가운데 오빠 나경석은 화가, 작가, 시인,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며 그의 영향도 받아서인지 나혜석도 3․1운동에 가입해 투옥되기도 한다.
남편은 동래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김우영으로 이들은 1920년 신식 결혼을 올려 장안의 화제가 됐다.
나혜석은 1921년 경성일보사 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최초 여류화가로 명성을 다진다. 나혜석의 화풍은 장중한 형태를 중시하는 고전주의 양식으로 색채는 약간 어둡다.
광주의 오지호 화가는 나혜석의 ‘농가풍경’에 반해 일생을 화가로 전념할 것을 결심한다. 마치 청년 피카소가 세잔느 작품에 감명 받고 더욱 화가로 입신출세를 다짐한 것과 같다. 그 무렵은 시인과 화가들이 한데 어울려 교류하던 때라 나혜석과 같은 신여성은 대거 환영을 받아 진보적 동호모임에 끼지 않는 곳이 없었다.
나혜석은 외교관인 남편의 부임지와 함께 세계를 여행하면서 이국적인 풍경인 만주 봉천, 프랑스, 스페인 풍경, 해수욕장 등을 남긴다. 금강산도 여행해 외금강의 ‘몽상정’ 작품도 남기고 선전에 출품해 연속 5회 입․특선의 영예를 얻어 언론의 중심이 됐다.
1928년 나혜석은 파리생활을 즐기는 중에 최린을 만나고 연애감정에 잠시 빠진다. 최린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한사람인데 점차 이광수 같은 친일로 기울려 입살에 오르내린다. 두 사람의 열애설을 과대 포장한 기사가 퍼지면서 남편은 이혼을 요구하고 나혜석은 노라처럼 인형의 집을 나온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주인공 노라부인이 스스로 집을 뛰쳐나가 페미니즘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언론은 그녀의 예술적 성과보단 여자의 정절문제만을 크게 보도했다. 이러한 세태에 나혜석은 반기를 들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혼고백서’를 발표한다. 나혜석은 이 글을 통해 자신이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와 남성이기주의를 상세하게 묘사한다. 현모양처를 최고로 치는 시대에 그녀의 고백의 글은 세상의 반발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전쟁으로 내닫는 시국까지 겹쳐 그녀는 잊혀져가는 작가로 전락한다. 이후 나혜석은 원고 청탁도 수입원도 없어 궁핍해졌다.
나혜석은 시립병원에 행려환자로 입원한 후 그곳에서 죽었고 무연고자로 처리돼 그의 묘지마저도 행방불명이 됐다. 나혜석 전기의 평전으로 이구열이 쓴 ‘너의 어미는 선각자였느니라’ 가 있다. 이 작품으로 사후 60년이 지난 후에야 나혜석은 햇살처럼 다시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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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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