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5월 7일 대흥사에서는 서산대사 탄신 제490주기 대제가 거행된다. 그런데 어떻게 서산대사의 의발과 부도가 대흥사에 오게 되었을까.
서산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 법호는 청허(淸虛)이며 평양의 서쪽에 있는 묘향산에서 주로 주석하였으므로 서산(西山)대사라고 불렸다. 1,520년(중종 15년)3월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나서 18세 때 지리산 대승사로 출가하여 31세 때에 승과시험에 합격하고 대선(大選)을 거쳐 3년 만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오른다. 1,589년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국문 때 선조임금과 대면하여 무고로 풀려나며, 대사의 훌륭한 인품에 감복한 임금은 극진한 예우 속에 어전에서 묵죽장자(墨竹障子)를 내리며 시를 나누었다.
서산대사는 입적하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죽거든 의발을 반드시 해남으로 보내도록 하여라. 그 고을에는 두륜산(頭崙山)이라는 산이 있고, 대둔사(대흥사)란 절이 있다. 두륜은 후미진 구석에 있어 이름 있는 산은 아니나 귀중하게 여기는 세 가지 뛰어난 것이 있다. 북쪽에는 하늘을 떠받친 월출산(月出山)이 있고, 남쪽에는 서리서리 얽혀서 지축을 이룬(盤結地軸) 달마산(達磨山)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천관산(天冠山)이 있다. 바다와 산이 서로 호위하므로 마을과 골짜기가 깊고 그윽해 만세동안 헐어 깨뜨릴 수 없는(萬歲不毁之地)땅이다.
또 해남은 황폐한 고장이라 국왕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여 백성의 풍속이 어리석고 미혹하다. 내가 이렇게 함으로서 백성들이 보고 감화되어 충(忠)에 흥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한 처영과 모든 제자들이 모두다 남쪽 지방에 있다. 내가 처음 출가할 때, 서로가 불법은 지리산에서 들었으니, 이곳을 종통으로 삼는 것이 도리어 귀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나의 유촉을 좇아서 의발과 주상이 내린 대선사 교지(大禪師敎旨)를 두륜산으로 옮겨서 보관하고 제사를 주관케 하라.”고 당부 한다. 이러한 유의(遺意)가 있어 서산대사는 묘향산에서 열반하였으나, 대사의 3년 상을 마친 뒤 제자 영잠(靈岑)등이 유의를 받들어 의발을 짊어지고 두륜산으로 옮겨왔다.
그 후 대사가 입적하신지 28년 만인 1631년(인조 9년) 봄, 문인 소요 태능(太能) 등이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였던 신풍부원군 장유(張維)에게 비문을 받아 대흥사 부도전에 ‘청허당 보제선사 비’를 세웠다.
비문이 세워지고 1655년에는 남은 유품을 모두다 대둔사로 가져왔고, 승도들이 영각을 지어 제향을 올리니 이후 대흥사는 서산문중(西山門中)의 본산(本山)으로 삼게 되었고, 이로부터 십삼(十三) 대종사(大宗師)와 대강사(大講師)가 배출돼 조선후기 불교 진흥의 요체가 된다.
그리고 정조 임금 때, ‘표충사(表忠祀)’ 사액(賜額)이 내려져 중앙에 휴정서산(休靜西山)대사를 모시고, 좌우에 유정사명(惟政.四溟)과 처영뇌묵 대사를 배향한다. 그 이듬해인 1789년 4월 예관을 보내어 향축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게 된다.
당시 승지(承旨)정약용(丁若鏞)은 상용(常用)제문을 지어내려 대사의 충의를 높였고, 또한 1791년에 홍문관 제학 서유린에게 간청하여 ‘표충기적비’의 명문을 지어 세웠다. 1794년에는 정조임금이 직접 쓴 ‘서산대사 화상당명(西山大師畵像堂銘)’이 대둔사에 내려져 현재 박물관에 액자로 보존되고 있다.
조선의 북쪽 끝에서 열반하시면서도 잠시 보임수행 하셨던 3000리 남쪽 끝 대둔사에 유독 의발을 보관토록 유언을 하시었으니, 그 인연은 무엇이었을까? 한양과 천리나 떨어진 곳이라 임금의 덕화가 미치지 못하지만, 성군의 깊은 은혜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낌을 증명할 근거를 댄다면 후세에 어찌 우매한 풍속을 깨우칠 자가 없겠는가. 미혹한 백성들이기에 충이 흥기되기를 바라서 그 유품을 대둔사에 보관하도록 하라는 대사님의 대흥사 사랑을 가슴에 새기며, 490주년 서산 대제를 경건히 맞이하였으면 한다.
저작권자 © 해남우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