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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광(曙光)보다는 저녁노을을 좋아한다. 낮 동안 이글거리던 태양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기 시작할 때면 어떤 시어(詩語)나 화가의 솜씨로도 채색하기 어려울 것 같은 황홀함이 태양 주변을 감싸고 있다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좋아한다. 이글거림 때문에 쳐다보기조차 힘들었던 태양이 산 고개를 넘어갈 때의 모습은 낮과는 전혀 다른 친근하고 포근한 모습이다. 나는 그 황홀한 순간을 좋아해 걸음을 멈추곤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태양이 모습을 감춰버린 하늘엔 짙은 회색구름이 태양이 지나간 길을 덮어버리고 만다. 아마 순간은 짧기에 아름다울 것이다.
내가 노을을 좋아함은 낮 동안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상적인 느낌 때문이다. 태양이 궤적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다가 멀리 산 너머로 사라져 가는 노을은 너무도 황홀하건만 그 순간을 내 힘으로 잡아놓을 수 없음을 알기에 노을을 보며 하루의 삶을 반조(反照)하곤 한다.
반조(反照)라는 말의 의미는 서산에 떨어지고 있는 해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왔던 길을 한번 되돌아본다는 뜻이다. 아침 햇살이 강함과 희망을 준다면 저녁노을은 언어만으로도 쓸쓸하다. 하지만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까닭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볼 수 있음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삶을 반조할 수 있음에 말이다.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120년의 나그네 길을 살다가 간 사람이다. 그의 삶은 궁중에서 40년, 외로운 광야에서 목자로서 40년, 그리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다시 부름을 받아 남은 40년의 삶을 살았다.
그는 평생 가나안 땅을 그리워했다. 그의 생애에도 황혼(黃昏)이 깃든다.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저만치에 가나안땅이 있는데…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았던 그는 황혼이 짙은 어느 날 느보산 비스가 산마루턱에 오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가나안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는다. 그의 눈앞엔 저녁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가나안 땅이 보이고 그의 뒤쪽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40년을 방황했던 광야가 펼쳐져 있다.
나는 모세가 서 있는 비스가 산마루턱을 늘 한 폭의 그림으로,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본다. 지나 온 길과 가야할 길의 사이에서 그가 삶을 반조하는 모습이 태양이 궤적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다 만들어낸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인생은 노을이 아름다워야 한다. 찬바람에 오색 빛깔을 드러낸 단풍잎처럼 보기에도 아름다워야 한다. 얼굴의 주름조차도 연륜의 그림자로 아름다워야 한다.
나에게는 췌장암을 앓고 있는 망년우가 있다. 그와 자주 전화를 한다. 그건 그 분의 처지가 애잔하다거나 안됐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그분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전화기 저편에서 인생의 깊음과 기품(氣品)이 느껴지고 그 분의 생각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 분은 6.5%라는 참으로 낮은 가능성 앞에서도 초연하다. 그 분이 인생의 노을을 맞이하는 가슴을 여기 옮겨본다.
「아름다운 꽃도 때를 알고 뚝뚝 무너져 내릴 때 아름답습니다. 지지 않으려고 시든 꽃봉오리를 애잔하게 매달고 있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그 끝이 추합니다. 먼지에서도 향내가 난다는 찬란한 봄도 때가 되면 여름에게 선뜻 자리를 내줍니다. 맹렬한 더위로 몽니를 부리던 여름도 떠날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가을이나 겨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자연은 순리를 따를 줄 압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의 일몰 앞에서 생명의 끈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몸부림을 합니다.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훠이훠이 떠나고 말 것을! 흔히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말은 쉽게 합니다. 인생은 서로 다른 인생관이라는 각본으로 연출한 자기 드라마의 주인공입니다. 때문에 암을 다스리러 산을 찾는 사람도 있고, 산에 가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저도 산으로 가 맑은 공기 마시며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본능에 동의합니다. 그러면서도 ‘삶의 밀도’에 방점(傍點)을 찍고 싶습니다. 오래 사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겠기에. 설령 산보다 탁한 공기와 소음으로 삶의 잔고가 빠르게 소모되더라도 그 동안 정들었던 이웃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고 싶습니다.」
나의 망년우의 말처럼 훠이훠이 손짓 한번하고 떠나갈 인생, 그 인생은 자기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의 밀도가 높을수록 노을은 아름다울 것이다.
서산으로 넘어가는 저 노을처럼 인생의 노을은 아름다워야 한다.
현실이 어려운데 어떻게 아름답겠느냐고 묻는다면 가슴에 남은 어떤 시처럼 이렇게 답하고 싶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힘든 고개를 넘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눈도 아름답고 비도 아름다운 것.’
출근길에서 휴지를 줍는 노인네를 보며 생각했다.
‘님들 때문에 보릿고개를 넘었습니다. 님들 때문에 이만큼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님의 궤적은 아름다웠습니다. ’내가 보는 노을은 아름답다. 아마 다른 사람이 보는 노을도 아름다울 것이다.
노을이 지고 나면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다시 바쁜 걸음을 걷는다.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한편의 드라마 같은 길을 간다.
‘삶의 밀도’를 생각하며….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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