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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그리고 빚보증, 나를 일으킨 건 막걸리였다
마흔아홉에 대입검정고시 합격 지금은 대입 준비생
무절제한 젊은날이 반면 교사가 되었다
‘한·일 양쪽 모두에서 프로야구 타격왕을 거머쥔 백인천도 세월이 던지는 공에는 속수무책이구나…’
며칠 전 신문에 프로야구 원년, 꿈의 4할 대 타율을 기록한 백인천 선수의 근황과 선수시절의 뒷얘기를 인터뷰한 기사를 봤다. 기자가 뽑아낸 기사의 제목이 가슴을 쓰리게 했다.
‘4할은 기술만으로 도달할 수 없다. 야구를 안 하면 죽을 것처럼 중독자가 돼야만 가능한 경지’ 내가 공감한 부분은 중독이었다. 술중독이 아니라 일중독, 즉 좋은 술 만들기 중독이라는 게 맞는 표현이다. 어떤 일에 일가를 이룬 이들의 공통점이라는 게 있다. 일이 미치도록 좋아서 빠져들었고 마침내 중독자가 되었다는 내용은 약방의 감초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결코 일이 좋아서 중독자가 된 것은 아니다. 오로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때문에 매달렸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중독자가 되었다.
감히 용 그림을 그리게 된 긴 이야기를 여기에 싣는다. 이렇게 표현해도 무리가 없는 게 초창기 하루 기껏 기십 상자를 생산하던 막걸리 양조가 하루 1500상자 이상 생산하는 공장과 그것을 커버할 수 있는 판매처를 구축하였으니 개인 사업치고는 별 과장이 없다고 본다.
그 세월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본다.
나는 1964년 전남 광양에서 2대째 양조업으로 가업을 잇고 있는 부친의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0~70년대 농촌에서 행세깨나 하는 집안의 가업이라는 게 양조장, 기름집(주유소), 정미소, 제재소였다.
다들 어려웠던 당시 내 유년 시절은 부족함이 없는 태평성대였다. 어영부영 사춘기를 거쳐 고등학교에 들어서자 내 인생은 급전직하로 곤두박질 쳤다. 이유 없는 이탈, 반항, 방황은 나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다.
7회의 전학을 거듭하면서도 종래에는 졸업장을 손에 넣지 못했다. 나는 작년 마흔아홉의 만학도로 대입 검정고시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나는 지금 2014년도 대입 준비생이다.
물론 아버님께서는 맏이인 나에게 많은 기대가 있었다. 속된 말로 표현해서 아버님은 나를 위한 일이라면 당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짚신을 삼는다’는 고사도 무색하게 할 그런 분이셨다. 나는 아버님의 기대에 조금도 맞장구를 쳐주지 못했다.
당시 시골에서 드물게 보는 승용차를 타고 무작정 남도를 누볐다. 어디를 가나 친구, 술, 여자가 있었다. 서너 해를 지켜보시던 아버지는 더는 못 참으셨던지 조기에 결혼시켜 내친김에 분가까지 시키기로 결심을 굳힌듯했다.
집안의 맏이이고 그간 탕아로서 아버님께 이반한 것에 대해 속죄하는 심정으로 나는 아버님 뜻에 고분고분 따랐다. 내 나이 스물여섯 되던 1989년, 연초에 결혼하고 봄에 분가하여 겨울에 아빠가 되었다.
아버님은 나를 분가시키며 보성의 ‘겸백양조장’을 인수해 내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셨다. 말하자면 3대째 가업을 잇는 단추가 되었다.
그러나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자신을 갈무리하며 처세할 준비는 전혀 돼있지 않았다. 정말 기고만장했다. 졸지에 면장, 우체국장, 파출소장과 같은 반열에서 노는 지역 유지가 되었다. 인수 당시에 하루 40통(800L) 생산하던 양조장은 채 2년이 못가 매출이 반 토막이 났다.
기술자(도지)가 떠났고 연이어 배달원이 떠났다. 생계가 막막했다. 어쩔 수 없이 도지, 배달원으로 나는 현장에 몸을 담가야했다. 밤에는 미생물학, 양조학 같은 생경한 공부에 빠져들었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발효실 온도를 체크하는 것을 시작으로 오만가지 허드렛일을 혼자서 처리해야 했다.
내 막걸리 인생에서 최고의 시련기였던 그때, 무엇보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나 자신도 모르게 발효에 서서히 중독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대형 주조회사 부설연구소, 배상면연구소, 세계적 효모생산의 권위를 자랑하는 네덜란드 회사를 찾아가 묻고 또 배웠다. 실험실에서 밤을 보내며 책을 끼고 살았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만 3년 만에 아버님이 주신 알토란같은 종자돈 3000만 원을 보성 겸백 하늘에 날리고 우리 식구는 난민 아닌 난민이 되었다. 5~6개월의 공백기를 두었다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진도 의신면 금갑리였다. ‘금갑양조장’을 월세를 얻어 다시 제2의 막걸리공장 문을 열었다. 종업원을 두지 않고 아내와 나는 밤낮으로 뛰었다. 밤에는 발효실에서 잠을 잤다. 처음 20통에 불과하던 매출이 6~7개월 만에 60통으로 뛰었다. 종업원을 두었고 양조장도 매수했다.
1995년 1월 25일 진도 시대를 마감하고 지금의 해남 ‘옥천주조장’을 인수했다. 진도 양조장은 부모님을 모시는 막둥이에게 무상으로 물려주었다.
집안의 맏이로 모처럼 아들, 형 구실을 한듯하여 나와 아내는 무척 보람있어 했다. 5000여만 원의 빚을 지고 옥천주조장을 인수했다.
사업 여건은 좋았다. 공장입지, 재료구입, 교통이 막걸리를 생산하고 판매하는데 최적지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공장 인수 후 수개월 만에 찾아온 불청객은 빚쟁이였다. 진도에 있을 때 친구 연대보증 책임을 물어 돈 갚으라는 독촉이었다.
이후 만 4년간 매월 적게는 50만 원 많게는 100만 원씩 꼬박꼬박 돈을 갚았다. 급기야 2000년도에 들어서자 한국자산공사에서 6억 보증 채무에 대해 옥천주조장에 대한 경매개시 결정문이 날아왔다. 하늘이 무너졌다. 그 와중에서도 잔소리 한마디 안하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사방팔방 백방으로 뛰었다.
친구 소개로 목포에서 변호사로 활동 하시는 선배님을 만났다. 선배님은 ‘개인회생제도’에 대해서 설명하시고 그 절차를 밟도록 안내했다. 결국 개인회생제도가 받아들여져 2000년부터 2005년 연말까지 매달 50만원씩 갚아나갔다.
돌이켜 보면 나는 빚보증 잘못 선 죄로 만 10년간 빚의 족쇄를 차고 살아야했다. 빚의 족쇄가 풀리자 하늘을 날을 것 같이 좋았다. 막걸리 사업과 발효연구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술은 포자와 효모의 조화에 있다. 좋은 포자와 효모 생산에 미치도록 매달렸고 혼을 쏟아 부었다. 수백 회 거듭된 실험으로 그들(포자.효모)의 특화된 성질과 조화를 하나하나 깨달아 갔다. 이는 곧 술맛으로 이어져 가근방에 입소문을 타고 사업도 나날이 번창하여 갔다. 식초 개발에도 나섰다. 쌀식초, 고구마식초, 참다래식초를 연이어 출시하였다.
드디어 국내 최초로 해남의 특산인 자색 고구마를 이용한 ‘고구마막걸리’를 2009년 4월에 출시하였다. 수백회의 실험을 거친 내 막걸리 인생의 최고의 역작이자 쾌거였다. 고구마막걸리의 생명은 항산화와 노화방지에 효능이 있는 와인 색깔을 내는 안토시안 색소 유지가 관건이다.
나는 수년의 준비기간과 수백회의 실험을 거쳐 빛깔도 영롱한 자색 고구마막걸리를 양산할 수 있었다. 세월도 내 편이었다. 마침 불어온 한류열풍을 타고 일본에 수출 길도 열렸다.
같은 해 9월에는 내가 꿈에 거리던 ‘막걸리명인’(제 09-247호)칭호를 받았다. 여기에는 포천에 있는 제자들의 공이 컸다. 마침 일본 스타TV와 인터뷰를 갖는 과분한 영광도 누렸고 여러 국내 매체에서 앞 다투어 취재를 왔다.
나는 졸지에 전국적인 유명인이 되었다. 밀려드는 인터뷰, 강연요청에 눈코떨새 없었다. 지역에 뜻있는 분의 요청으로 ‘사단법인 해남발효식품연구회’를 결성하여 매월 1회씩 정기적모임을 갖는 등 지역 문화행사에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내 나이 지천명(知天命)에 와서 인간다운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무절제한 젊은 날이 반면교사가 되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보유한 막걸리명인 전수자는 두 사람이다. 한분은 지금의 옥천주조공장장, 또 한사람은 내 맏아들이다. 맏이는 대학 식품영양학과를 나와 본인 스스로 이 길에 뛰어들었다. 말하자면 4대째 가업을 잇는 셈인데 나로서는 참 다행스럽고 대견한 일이다. 나는 이들을 전수시키면서 귀가 아프도록 하는 말이 있다.
“막걸리 명인이기 전에 먼저 사람부터 명인이 되어라.”
올해 내 나이 50세, 오로지 막걸리 만들기 외길 25년을 쉼 없이 달려왔다. 이제 한 달 후면 내 작은 꿈이 이 가을과 함께 찾아온다. 그 옛날 옥천면민들이 봇짐을 지고 우마차를 끌고 넘나들었을 삶의 애환이 젖은 우슬재 끝자락에 하루 생산량 3만L 규모의 막걸리 공장이 들어서고 그 마지막 공사인 저온 냉장고 창고 준공을 목전에 두고 있다.
나는 원래 사업가 기질을 타고나지 않았나보다. 특히 금융 쪽은 숙맥이었다. 25년간 양조업을 하면서 자금 때문에 시달림을 받은 적이 어디 한두 번 이었으랴만 단 한번도 내 스스로 앞에 나서서 해결한 적은 없다. 그러다 보니 소규모의 돈은 모두 아내가 도맡아 해결했다.
새 공장이 무리 없이 증축되고 공사도 막바지에 이른 올봄에 저온 냉장고 증축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역시 자금 문제였다. 무슨 일이든 특히 공장을 세우는 일은 항시 예상보다 상회하여 자금이 집행되기 마련이다. 정말 난감했다.
난생 처음 지역 금융기관 대출창구에 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돈 많은 지역 전주를 찾아가서 읍소도 했다.
처음에는 쉽게 해결되리라던 기대와 달리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아내도 적극 나섰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친정으로 친구 집으로 내돌렸다.
정말 우연히 올 5월에 친구로부터 전남신용보증재단에 대해서 정보를 입수했고 마침 개소한 전남신용보증재단 해남지점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이 이 경우에 딱 들어맞았다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용 그림을 다 그려놓고 눈동자를 그릴 물감이 없어 난감해하던 차에 전남신용보증재단에서 눈동자를 찍을 물감을 주어 용 그림을 완성시켜준 격이 되었다.
박영자 기자/
해남우리신문
wonmok76@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