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린 메카시즘이라는 중독에 걸린 바 있다. 극좌 아니면 극우, 특히 분단국가인 우린 극단적 이데올로기 앞에서 어느 편엔가 서야했다.
회색지대는 인정받지 못했다. 개량주의자, 기회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였다.
그러나 독재권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극단의 논리가 아닌 다양한 논리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사회도 다양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양성은 문화예술 영역에서 먼저 꽃을 피웠다.
영화와 연극 가요 등에서 독특한 소재들이 관중의 시선을 잡았고 여기에 아이돌 가수들은 10대를 사로잡았다.
특히 가수 싸이의 등장은 우리사회의 다양성이 가져온 결과였고 그의 활동에 우린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변을 둘러보자. 국정원의 대선개입이 불거진 이후 어머어마한 사건들이 등장하면서 다시 극단의 논리가 우릴 옭아매고 있다.
국가 기밀이 돼야 할 남북정상들의 녹취록이 등장하고 이석기 의원의 지하조직이 등장했다.
진보는 종북세력이라는 낙인, 국정원 사건 지휘에 나선 한 나라의 검찰총장은 보수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서로의 진의를 떠나 어느 한편으로 몰리는 시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다. 130여명이 모여 나라를 전복시킬 모의를 했다는 이석기 의원, 그들의 논의에 공감하지 않는 국민들이 다수인데도 국정원은 우리사회를 극단으로 몰고 있다.
처음 이석기 의원 사건을 접했을 때 너무도 황당했다. 물론 화도 났다.
진보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이 논한 내용이 평화가 아닌 조잡한 전쟁 이야기라니. 진보의 가치는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 위에 존재한다.
남북이 대치된 한반도에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평화이다. 6․25전쟁, 동족간 전쟁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국제전이었다. 다시 한반도에 그러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또한 국제전 양상을 띌 것이다.
우리의 땅에서 숱한 동포가 죽어가는 전쟁을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우린 줄기차게 한반도의 비핵화를 외치며 평화를 주장한다.
우리가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인간의 존엄성을 넘어서는 사상은 존재할 수 없다. 허용돼서도 안된다.
이석기 의원 사건에서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 생명의 소중함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화가 났던 것이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처음의 소동에서 많이 잠잠해 졌지만 상처는 깊다. 상처란 이미 구시대 유물로 치부했던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다시 우리사회에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도 극단적인 진보와 보수로 갈라지고 국민들도 그 어느 편에 서길 강요당하는 분위기가 팽팽하다.  
그러면서도 우리사회에 희망이 있음을 본다. 커지지 않는 국정원 개혁 촛불집회이다.
지금이 70~80년대라면 국정원이 전 국민을 경악케 한 종북사건을 들고 나왔다면 상상할 수 없는 변화이다.
각계각층의 시국선언문도 잇따르고 있고 종교단체들도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은 이렇다 할 답이 없다.
구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도 국민들의 저항 앞에 대통령 직선제 카드를 내 놓았는데도 말이다.
국민의 외침은 민의이다. 그것도 민주주의를 유린한 사건은 묵과할 수 없는 죄명이다. 이를 묵과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힘을 가진 권력자들에게 유린될 가능성이 높다.
130여명이 모여 국가를 유린하려 했다는 발표를 놓고 온 사회가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난리가 난 우리사회, 차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 스스로 극단의 메카시즘에 갇힐 수 있다.
가수 싸이가 그립다. 자유롭고 분방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이들이 그립다. 자유로운 영혼, 자유로운 사상은 우리를 풍요롭게 만든다.
다양성이 아닌 극단의 논리가 이끄는 사회는 위험하다. 그것은 독재권력이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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