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5월입니다. 이십 년 전만 해도 고향 들녘에선 소를 앞세우고 쟁기질하는 풍경이 자연스럽게 펼쳐졌습니다. 요즘엔 기계화 덕분에 그마저도 텔레비전 영상에서나마 종종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선 제가 대학 다닐 때 등록금 댄다고 밭도 팔고 소도 팔아버려 이젠 그야말로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네요. 지금도 쟁기질 하면 떠오르는 유년시절의 풍경은 늘 제 가슴 속에 아스라이 남아 있습니다.
해마다 논을 갈아엎고 못자리를 설치하고 모내기를 할 때면 아버지께서는 옆집 소 없는 사람들의 논까지도 갈아엎어 주셨지요. 품삯을 얼마나 받고 그러셨는지는 몰라도 날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들녘에서 쟁기로 논을 갈고 계시는 아버님께 동생과 놀러가곤 했지요. 어느 날인가 논주인 아주머니가 새참으로 끓여다준 라면을 보자 저와 동생은 군침이 돌았지요. 아버님은 그 라면을 저희에게 주시며 퍼지기 전에 얼른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버님 생각은 하지 않고 저와 동생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습니다. 그 다음 날도 혹시 또 라면이 새참으로 올까 싶어서 동생과 논으로 갔는데, 역시 그날도 라면이 나왔지요. 역시 라면을 한참 먹고 있는데 갑자기 논주인 아주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 속아지 없는 새끼들 보소! 느그 아버지는 하루 종일 일하느라 얼마나 배가 고프겄냐!”
그 한 마디에 저와 동생은 얼른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먹을 땐 몰랐는데 그 질책을 듣고 나서야 저와 동생이 얼마나 속없는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씁쓸해지는 삶의 풍경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커다란 감나무 밑에 몇 그루 심겨 있던 딸기가 붉은 색을 띠기도 전에 가서 따먹어 치우고, 감꽃도 학교 가는 길에 주워 먹던 시절이었으니 말입니다. 요즘에 비해 간식거리나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해도 참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민망합니다. 그럼에도 아버님은 간식으로 나온 보름달 빵까지도 저희에게 던져 주시곤 했습니다. 보름달 빵을 똑같이 나누어 먹으려고 동생과 옥신각신 다툰 적도 많았지요. 서로 더 큰 놈을 먹으려고 눈을 부라리던 그 시절을 생각하니, 어떻게 보면 평등(平等)이란 것도 반달처럼 정확히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좀 덜 먹을 때도 있고, 더 먹을 때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이 세상의 평등도 조금씩 부드러워질 수 있을 듯합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아버지께서 연필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써 보내주신 편지는 제대할 때까지 이기고 견디게 해준 힘이었습니다. 불시 검열에 걸려 모든 편지를 폐기해야 했지만 그때 보내주신 아버님의 응원은 지금도 잊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아버님!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아버님도 올해엔 벌써 팔순이 되셨습니다. 작년까지 식량 삼아 짓던 10마지기도 안 되는 농사도 이웃집에 넘겨주셨다고 하니 잘 하셨습니다. 이젠 편히 쉬시면서 취미 생활도 하시면서 지내십시오. 종종 어머니와 함께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다니세요. 건강하신 모습으로 저희에게 늘 아름다운 삶의 여정을 보여주세요. 저희도 함께 하겠습니다. 어버이날 때 고향엘 들르겠습니다. 내내 강녕하시기 바랍니다.
해남에서 다섯째 아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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