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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1모작 못자리를 한 날 형님과 어머니는 비가 와야 한다고 하셨어. “얼마 전까지 지긋지긋하다던 그 비가 지금은 내려야 해요?” 하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응 지금은 조금 내려 줘야 해. 마늘도 그렇고 양파도 그렇고…”하고 말씀하시네.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발이 아침에는 제법 세게 베란다 창을 때리더군. 남편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광주 금남로 옛 도청 앞에서 방송을 하고 있다는 ‘손석희의 시선집중’ 진행자의 멘트가 흘러나왔어. 무감해진 일상을 깨고 아! 5.18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
이번 비는 단비인지 이파리들의 색이 더 진해졌네. 나무며 꽃들을 쳐다보며 큰 우산을 펴들고 난 공원의 산책로를 걸었어.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추억이 찾아오더라. 5·18이라 그랬을까. 우린 대학 자율화 세대였지.
내가 대학에 입학한 그 해는 캠퍼스에 상주했다던 경찰이 교문 밖으로 철수를 했다지. 그러나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내려 학교까지 가는 길엔 온통 중무장한 전경들과 사복들 천지였어.
그래도 하늘은 푸르렀고 난 자유로웠어. 그러나 그 아름답던 캠퍼스, 특히 봄이면 더욱 아름답던 그 벚꽃 만발한 등용문과 4·19탑 사이의 등하교길이 함성과 고함과 군홧발 그리고 최루탄과 사과탄의 메케함으로 뒤덮이고 콧물 눈물로 범벅인 얼굴에 꽃비를 맞으며, 무지해서 자유로웠던 순진한 나의 자유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있었어.
내가 대학 와서 처음 알게 된 광주의 그 일들에 분노하고 소리칠 때 너희 호남 출신의 방관에 참을 수가 없었어. 그런 자리에 와서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아야! 조심해라.”는 말을 하는 너. 넌 그렇게 꼭 나와서 뒤에서 쳐다보고 있었지 아마.
그 당시 내게는 이것은 이것일 뿐 저것은 죽어도 될 수 없었어. 그래서 더욱 널 이해할 수 없었지. 그렇게 난 ‘오월! 그 날이 다시오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를 목이 터져라 불러가며 대학생활을 했지.
얼마 전 영어사(English history)에서 영국의 영어를 공부하던 중 액센트에 대한 말이 나왔어. 그 액센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투리마다 다른 액센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계급마다 다른 액센트에 대해서였지만 말이야. 액센트는 바뀌지 않는 거래. 그 때 문득 네 생각이 나더라. 아마 전라도 사투리와 표준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던. (하도 오래 전이라 내가 확실히 기억을 하는가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액센트를 바꾸기 위해서 애를 썼던 것도 무서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을 거야. 감춰진 진실로 우리는 눈멀고 귀 먼 세상을 살았으니까. 아마 그 날에 그 광주에 있었을 어린 네게는 그 함성과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공포 그 자체여서 귀를 두 손으로 막아버리고 싶었을 기억일 테니까. 나의 분노는 이성적인 분노였지만 너의 분노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공포의 분노였을 거다. 나는 운동을 했지만 공포와 무서움과 분노로 가슴으로 생존 투쟁을 하고 있었을 널 진정 이해할 수 없었다. 난 행동을 했지만 너의 마음을진정 알지 못했다. 그래서 미안하다. 친구야.
이천십년오월십팔일에
해남우리신문
wonmok76@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