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무형유산을 찾는 대장정 ⑭한국무용가 한영자(1998년 한밭전국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대통령상 수상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지금껏 후진양성
이매방, 강선영, 한영숙류 등 굵직한 춤 대부분 익혀
한국무용가 한영자(70)씨,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들 중 유일하게 추정남 고수와 함께 고향을 지키며 후진양성에 힘을 쓰고 있는 이다. 또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들만이 출전하는 대한민국 국창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한국무용가로서 가장 영예로운 천하명무로 선정된 이다.
북일 내동마을 출신인 한 선생은 어릴 때부터 국악을 접했다. 북일 갑부였던 아버지는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맞춰 북과 장구를 쳤고 수시로 국악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성대한 잔치를 열곤 했다.
한 선생은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가 외출 중일 때 집에 있던 장구와 북을 치며 놀았고 초등시절 무용발표는 도맡다시피 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부잣집 딸이 국악을 익힌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고 아버지의 세계관에서도 국악인 자식은 허용될 수 없었다.
초등시절 공부를 잘했던 그녀는 광주사대부중에 합격해 이곳에서 전남도대표 배구선수로 활약하게 된다. 그런데 뒤늦게 딸이 공부가 아닌 배구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고교진학을 앞둔 시기에 딸을 집으로 데려오고 만다.
중학교 때 배구선수로 활약
이로 인해 당시 명문고였던 전남여고 시험일을 놓친 그녀는 장학생으로 광주 중앙여고로 진학하게 된다.
그녀는 중앙여고에서 1년간 배구선수 생활을 하다 배구팀이 해산되자 선수생활을 접는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국악을 하던 완도 분을 통해 광주공원에 있던 광주시립국악원을 알게 되고 이곳에서 아버지를 알고 지내던 단원들의 권유로 춤을 배우게 된다. 토~일이면 장구와 북, 구음에 맞춰 굿거리 춤 등을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한국무용과의 첫 인연이었다.
이때만 해도 한국무용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 어깨 너머로 배우는 춤도 아버지가 알까 두려웠다.
남들에 비해 이른 나이에 결혼한 그녀는 3명의 자녀를 둔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릴 때 남편은 세상을 떠난다. 이때부터 그녀는 몸이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 진료를 비롯해 각종 운동이며 댄스 등을 익히지만 어지럼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광주 임동 문화센터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임동 문화센터를 찾아가 수강생들이 추는 춤을 보니 정말 쉬어 보였다. 그날 당장 초급반과 중급반을 동시 신청했다. 그러나 웬걸, 초급반 강습 첫날부터 몸살이 나고 말았다. 한국무용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것이다. 이곳 문화센터에서 2개월 정도 배우던 중 수강생들이 광주 옛 도청 인근 극장에서 공연이 있다며 그녀를 데리고 갔다. 한국무용가 이상순 선생의 발표회 자리였다.
첫 출전 국악대회서 우수상
이상순 선생은 광주에 한국무용을 정립시킨 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때만 해도 나이든 이들이 공식 무대에서 공연한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무작정 분장실로 찾아가 이상순 선생이 운영하는 학원에 등록했다. 1달 후 이상순 선생으로부터 살풀이 작품을 받기 시작했고 10년간 그 밑에서 공부를 하며 해외뿐 아니라 국내 여러 공연을 다녔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공연을 다니면서도 대회 출전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춤을 춘 후 몸이 건강해졌고 춤이 좋아서 췄을 뿐, 그리고 혹 아버지가 춤을 춘다는 것을 알까 하는 두려움도 컸다.
그러던 중 42세가 되던 때에 목포국악경연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대회에 나온 이들은 도립이나 시립무용단 출신이고 일반 주부들은 찾기 힘들었다. 덜컹 겁이 났다. 그런데 첫 출전인 이 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게 되고 대회 심사위원으로 나온 정명숙 선생을 만나게 된다. 정 선생은 춤은 잘 추는데 체계성이 부족하다며 한번 찾아오라고 했다. 명함을 받고 한 달 후 서울로 올라가 정 선생을 만났다. 이때부터 춤을 배우기 위해 광주에서 서울로 종종거리는 생활이 25년이나 이어진다. 주말이면 버스를 타고 정 선생의 집으로 찾아가 춤을 배웠다. 새벽밥 먹고 광주에서 서울까지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생활이었다. 또 광주여자대학에 진학해 춤과 관련해 이론과 실기를 익히던 때였다.
한밭국악경연대회서 대통령상
정 선생 밑에서 10년을 배우는 동안 고향인 해남을 오가며 추정남 선생에게 북을 배웠다. 그리고 국무총리상이 걸린 대구국악경연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 장원인 국무총리상을 받고 이어 1998년 한밭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게 된다.
국무총리상과 대통령상을 받은 후 전국의 국악대회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첫 심사위원을 맡았던 해남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모든 춤을 익혀야 제대로 된 심사를 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심사 보는 내내 가슴이 옥죄고 이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식은땀만 줄줄 흘렸다. 자신이 배운 춤은 호남 춤에 국한됐다는 자괴감, 전국대회에 출전하는 이들이 추는 살풀이 춤도, 태평무도, 승무도 종류가 다양하다는 사실과 이러한 춤을 몸소 익혀야 춤사위 하나하나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다시 서울행이 시작됐다. 이때는 해남에서 한영자무용학원을 운영하며 고향에서 왕성한 활동을 할 때라 해남과 광주, 서울로 오가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나이도 먹었고 대통령상까지 받은 이가 이곳저곳으로 춤을 배우려 다닌다는 것에 대해 남들이 어찌 생각할까 의식도 됐지만 이매방 선생에게 살품이 춤을, 강선영 선생에게 태평무, 정재만 선생에게 한영숙 류의 태평무와 승무를 배웠다. 또 진주를 다니며 김수악 선생에게 진주교방굿거리를 4년 배워 이수했고 정읍 우도농악 문화재인 이영상 선생으로부터 설장구를 6~7년간 배웠다.
천하명무가 되다
그녀는 2012년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들을 대상으로 열린 제1회 국창대회에서 명무반열에 오르게 된다. 포항에서 열린 국창대회는 판소리 부문 장원은 5000만원, 무용과 기악분야는 2000만원이라는 큰 상금도 걸렸지만 대통령상 수상자들 간의 대결이라 그야말로 영예가 걸린 대회였다. 그녀는 이 대회 무용부문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해 대한민국 최고의 명무가 된다.
한 선생은 서울을 오가는 바쁜 일정에서도 고향 해남에 많은 족적을 남긴다.
2006년도에 효 사상과 상생의 철학이 담긴 바리데기 굿을 해남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 올린다. 바리데기 굿에서 나오는 제의식을 대형 창작무로 만든 이 작품을 위해 그녀는 2년간 해남주부들을 지도했고 안무 및 연출에만 4년이라는 시간을 소요했다.
2007년에는 해남 노인 합북패를 만들어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동안 판소리는 한 명의 고수에 한 명의 명창이 소리를 하는 것으로 인식돼 왔었는데 한 선생이 창안한 합북에 의해 이러한 틀이 깨지고 한 명의 명창에 여러 고수가 동시에 북을 치는 장르가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2008년에는 하늘이 열리고 환웅의 자손이 고조선을 세우는 과정을 극으로 만든 ‘신시를 열어라’ 공연을 올린다. 대형 창작무인 이 공연도 해남 지역 주부들이 출연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우는 과정을 집단 창작무로 연출한 이 작품은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관중을 사로잡았다.
2009년에는 무형문화유산의 세계 최고 권위자들로 구성된 국제저널 ‘무형문화유산’ 편집 및 자문위원들이 그녀의 공연을 보기 위해 해남을 찾았고 2011년에는 마한 소국 중 하나였던 송지면 군곡리 국제 해상세력의 탄생과정을 해남전통군무로 재탄생 시켰다.
이때 선보인 해남굿거리는 황도훈 전 문화원장이 작사를, 고 박병천 씨가 소리를, 작곡은 중앙대 박상화 교수가 맡았다.
한 선생은 춤은 무언의 대화이고 그 속엔 무언의 스토리가 담겨야 한다고 말한다.
눈빛과 손짓, 고개짓 등에 스토리가 담겨야 한단다. 그는 추정남 선생에게 북장단을 배우면서 춤에도 가락이 있음을 알게 됐다. 북장단이 우주를 일으키고 맺고 끊고 풀고 당기고 밀듯 몸짓도 이러한 리듬을 몸에 실어야 한다며 북장단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됐음을 밝힌다.
고향에 큰 족적을 남기며
한국국악협회 해남지부장을 맡아 해남의 국악저변을 위해 뛰고 있는 한 선생은 대통령상에서 국무총리상으로 격하된 땅끝해남 전국국악경연대회를 지난해부터 대통령상으로 격상시켰다. 대통령상 수상 이후 100여 곳에 이르는 국악대회 심사를 맡고 있는 그녀는 해남에 한국무용 시대를 연 이기도 하다. 문화예술회관과 여성회관을 비롯해 각 면 단위와 학교, 무용단을 결성해 해남에 무용시대를 연 1세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