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서울중심 남종화 호남을 중심으로 토착화
미산 남농 의재 등 걸출한 후손들 소치화풍 이어

 

 

(공재의 사실주의 백마도)

 

▲ 조선말기 추사 김정희는 남종화를 풍미시키고 소치는 이를 호남지방으로까지 확대시켜 토착화시킨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종화 중심의 화단의 편식으로 인해 공재가 개척했던 풍속화와 사실주의, 진경산수 화풍들은 사그라지고 만다. (소치의 남종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에 커다란 변화가 인다. 이념과 형식에만 치우친 성리학에 대한 반성이 일기 시작했고 이러한 바탕에서 학문과 회화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학문에서 실학사상이 풍미한 반면 회화에선 진경산수의 대두와 풍속화의 풍미, 서양화법의 수용, 남종화의 본격적인 유행이다. 조선 후기 이러한 회화풍을 가능케 한데는 공재 윤두서의 몫이 크다.
풍속화와 진경산수화, 서양화법과 남종화의 수용에서 공재 윤두서는 선구자였다. 철저히 실학에 바탕을 둔 그의 회화풍은 조선후기 화단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숙종말기에서 시작된 다양한 회화풍의 등장은 영조~정조 시기에 꽃을 피웠고 따라서 영정조 시대를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라 칭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선 말기에 이르러 다양한 화풍은 사라지고 김정희 류의 남종화만이 풍미하게 된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예술의 편식이 가장 심했던 시대가 된 것이다. 
임진왜란 전 조선의 학문은 형식적인 예를 중시한 주자학이 풍미했다. 윤선도와 송시열이 싸웠던 예송논쟁 등 현실에 바탕을 두지 않는 사상논쟁으로 당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을 겪게 된다. 이러한 반성 위에서 등장한 다양한 학문과 회화, 그러나 조선말 다시 회화의 편식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남종화 풍미, 화단 편식시대

추사 김정희는 천부적인 예술인이었다. 시서화와 전각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으며 추사체라는 독특한 경지에 이른 글씨를 남긴다. 따라서 추사가 활동했던 시대를 완당시대로 일컬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추사는 중국의 황공망과 예찬의 글씨와 화풍을 추앙했다. 추사는 사실적 바탕의 화풍이 아닌 선비의 이상과 의지를 반영한 사의적 화풍을 추구했고 그 외의 화풍에 대해선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관념적인 성리학과 예만을 중시한 주자학에 지친 조선에 다시 사의적이고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남종문인화풍의 풍미, 추사의 회화 경향에 대해 사대적이란 비판이 이는 이유이다. 
공재는 중국에서 일어난 남종문인화를 적극 수용했지만 남종문인화는 그의 그림세계에선 일부였다. 풍속화와 진경산수화, 사실주의 화풍에, 글씨에선 동국진체 등 중국 것이 아닌 우리 것을 찾고자 했고 풍속화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려 했다. 이러한 열려있는 사고와 실학을 바탕에 둔 그의 학문적 세계가 그를 다양한 회화세계로 이끈 것이다. 

남종화 풍미, 혁신적 화풍은 사라져

그러나 조선말기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남종문인화의 풍미로 그가 개창한 회화세계는 희미해지고 만다. 공재 사후 30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의 회화세계가 빛을 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김정희의 남종문인화풍이 조선말기 회화의 중심이 됐던 것은 김정희의 방대한 교류도 한몫했다. 옹방강과 완원 등 중국 학자와 화가뿐 아니라 조선의 학자 및 승녀, 중인 계급까지 실로 방대했다. 
그는 학문과 예술을 교류하는 데 있어 출신성분도 뛰어넘었다. 진도출신의 몰락한 양반 후손인 소치가 조선말 남종문인화의 중심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또 추사는 대단한 집안의 후예였다. 고조부인 김흥경은 영의정, 증조부는 영조의 사위, 생부 김노경은 병조판서를 지냈다. 추사 또한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암행어사, 공조참판, 형조참판 등의 벼슬에 올랐다. 대단한 집안에 학문과 예술적 재능, 높은 벼슬까지 오른 추사에 있어 세상에 무서움도 두려울 것도 없었고 따라서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자신이 추구한 문인화풍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대로 따라준 소치 외의 사람들에게 거침없는 비판을 일삼았던 이가 추사였다.  
추사가 활동하던 시기, 대흥사 일지암엔 초의스님이 있었다. 초의스님도 일지암을 중심으로 방대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초의는 추사를 비롯해 다산 정약용, 신관호, 혜장 스님 등과 교류하며 차의 중흥을 이끌었다. 중국차가 아닌 우리 차의 우수함을 밝힌 동다송을 저술한 초의스님에게 어느날 소치 허연이 찾아왔다. 

소치, 추사의 가르침에 충실

초의선사는 허련에게 있어 최초의 스승이자 출세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다. 초의는 녹우당에 보관된 ‘공재화첩’을 볼 기회를 제공하고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서화가였던 추사를 만나게 해 준다. 
초의의 소개로 추사의 눈에 들게 된 소치는 32세 늦은 나이에 상경해 추사의 지도를 받게 되고 추사는 소치를 두고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고 극찬한다. 추사는 소치에게 남종문인화의 본질인 신운(神韻)을 가르쳤고 이러한 가르침에 충실했던 소치는 스승이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을 때도 세 번이나 목숨을 걸고 제주도로 건너가 스승을 배알했다. 

소치, 남종화 토착화시켜

지방 출신 화가가 왕 앞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소치는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과 민승호, 김흥근, 정원용,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익 등 유명 인사들과 교유하며 평생 사대부 지향적인 삶과 남종화로 일관했다. 
몰락한 양반 집안이자 너무도 가난했던 소치는 중앙의 명사들과의 교류에 집착했고 따라서 평생 고향에서 서울을 왕복하는 삶을 살았다.
소치는 명사들과의 교류를 통한 문사적 취향을 즐기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했고 다작은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호남에서도 헌종까지 알현한 그의 명성은 자자했다. 특히 조선 말기 중인과 문인들을 중심으로 팽배한 관념적 사대부 취향과 그의 작품경향인 사의적 남종화는 연결돼 소치 말년까지 작품수요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말 추사로 인해 남종문인화가 풍미하는 등 화단의 편식이 심했지만 소치를 통해 서울중심의 남종문인화가 호남을 중심으로 토착화 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따라서 남종문인화는 소치로 인해 토착화되고 호남을 예향의 도시로 끌어올린다. 
이로 인해 소치는 근현대 호남화단의 실절적인 증조로 일컬어진다. 또 그의 후손인 마산과 남농, 의재로 화업이 이어지고 지금까지 활동하는 후손들이 많을 정도로 소치의 회화세계는 가전됐다는 특징을 남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해남우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