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화단 양대산맥 남농과 의재, 남종화 대중화시켜
진도, 목포, 광주 남도회화 3대 지역으로 자리잡아

 

▲ 소치는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추사를 3번이나 찾아가 남종화 수업을 계속해서 받는다. (제주도 서귀포에 위치한 추사유배지)

 해남 식당과 관공서, 가정집에 하나쯤 걸려있을 남종문인화는 호남 화단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최근에 이르러 남종문인화는 다양한 현대적 작품에 의해 밀려나고 있지만 호남에서만큼은 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남종문인화는 중국 화보를 통해 조선에 전래됐는데 이를 적극 수용한 이가 공재 윤두서이다. 실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화풍을 선보였던 공재는 당씨화보를 통해 접한 중국의 남종문인화를 실험적인 측면에서 수용했다. 
남종문인화의 특징은 수묵만을 주로 사용하고 여백을 많이 둬 화면 대부분을 비워두는 것이다. 또 오두막 1채와 나무 몇 그루만을 그려 넣어 쓸쓸하고 적막한 분위기를 주는데 이러한 풍의 남종문인화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도 느낄 수 있다. 
한마디로 남종문인화는 고고한 선비들이 추구하는 절제된 삶, 이상주의적인 세계 등 사의적 성격이 강한 화풍이다. 따라서 문인화가들은 수양적이고 여가 차원에서 남종문인화를 그렸다. 
이러한 남종화는 17세기 조선에 전래됐다가 1700년에 공재와 정선 등에 의해 수용되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직업화가들까지 수용하게 된다.  

남종화, 해방 후 남도에서 계승 

▲ 남도의 특징인 남종화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국립광주박물관 내 서화실에는 소치와 미산, 남농, 의재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공재가 적극 수용했던 남종문인화는 추사 김정희에 이르러 사의적 측면이 더욱 강해진다. 추사 김정희는 남종화의 본래 이념인 정신적인 가치, 즉 사의적 측면을 더욱 따를 것을 주창했고 추사의 주장을 충실히 따른 이가 소치 허련이다.    
남종화는 일제강점기 때까지도 조선 화단의 주류를 형성했다. 해방 후에는 호남화단을 중심으로 계승돼 남도의 그림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추사로 인해 더욱 풍미하게 된 남종문인화는 추사의 제주도 유배 9년,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조선 화단의 중심이었는데 그 중심에 소치 허련이 있었다.
32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이 됐던 소치는 추사의 사랑채에 머물며 서화수업을 받는다. 또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자 3차례나 제주도로 건너가 그림수업을 계속했다. 

추사, 소치에게 중국 화법 전수

소치는 추사로부터 중국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인 북송의 미불, 원나라의 황공망과 예찬, 청나라 석도의 화법을 배웠고 김정희의 서풍도 전수받았다. 
추사 김정희는 소치 그림에 대해 “화법이 심히 아름다우며, 우리 고유의 습성을 타파하여 압록강 이동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라고 칭찬했다. 소치가 지향했던 회화세계는 추사가 추구했던 중국 남종문인화의 정신인 사의의 표출이었고 이에 추사는 중국 원나라 말 화가인 황공망의 호인 대치를 본 따 제자 호를 ‘소치’라 지어줬다. 
또 소치는 중국 남종화의 시조인 왕유(王維)의 자를 본떠 자신의 이름을 ‘허유’라 개명하고 운림산방의 운림은 원나라 말기 남종화가인 예찬의 호에서 따왔다. 이렇듯 이름과 호를 중국 화가들로부터 따 올 만큼 소치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중국 남종화의 이념을 충실히 따르려 했다. 추사로부터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힌 소치는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릴 만큼 명성을 얻었다. 추사의 제자인데다 임금 앞에서 그림을 그린 그의 명성은 당시 호남지방에도 자자했다. 
소치는 스승인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49세 때에 진도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짓고 작품활동을 계속한다. 소치는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울을 왕래하며 유명 문인들과의 교류를 지속했다. 

소치, 남종화 토착화시켜

▲ 목포 남농기념관은 소치 허련에서 시작된 남도의 남종화 흐름을 알 수 있도록 그림들이 배치돼 있다. 남농은 소나무 그림에서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남겼다.

소치는 중국으로부터 온 남종문인화를 우리나라에 토착화시킨다. 또 소치의 회화는 당대에 끝나지 않고 아들인 허은과 허형을 통해 가전돼 남도화단의 토대가 된다.
소치의 화맥은 그의 넷째 아들 미산 허형으로 이어지는데 허형은 부친에 이어 산수화와 사군자 전반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허형은 아버지 소치와 달리 견문을 넓힐 기회를 얻지 못했고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기에 소치가 가졌던 문인적 자부심이나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약했다. 
그러나 허형은 남농 허건과 의재 허백련으로 하여금 가문의 화맥을 잇게 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진도 운림산방에서 태어난 남농 허건은 미산 허형의 4남으로 태어났다. 허건은 소치의 사의적인 남종화풍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필법을 구축해 현대적 화법으로 구축해 나간다. 남농 허건은 진도 운림산방을 중심으로 말년을 보낸 조부 소치와 달리 목포에서 거주하며 목포를 남종화의 고장으로 끌어올린다. 
또 남농은 남종화의 200년 뿌리를 이어가야 한다며 진도 운림산방을 복원해 진도군에 기부하고 200여 점의 수석과 소치, 미산, 자신의 작품을 목포향토문화관에 기증한 데 이어 남농문화재단 및 남농기념관을 목포에 건립한다.    

남농, 의재 호남을 예향의 도시로

남농이 목포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때 광주에선 의재 허백련이 활동했다.
의재는 소치 허련의 방손으로 집안 어른인 미산 허형으로부터 화법을 배웠다. 그는 광주에 정착해 농업학교를 세워 농업과 의식 계몽에 힘쓰는 한편 춘설헌을 중심으로 제자를 양성해 남농 허건과 더불어 근대 남도화단의 양대 산맥을 이뤘다.
허백련은 일찍이 한학과 서예를 바탕으로 시서화를 겸비해 남종문인화의 본질을 잃지 않은 전통회화를 고집했다. 
이로 인해 남농 허건과 의재 허백련은 호남의 양대 화맥을 형성했고 이들이 남긴 전통회화의 업적은 한국 현대회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또 진도를 기반으로 했던 소치 허련과 미산 허형, 목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남농 허건, 광주에서 활동한 의재 허백련으로 인해 진도와 목포, 광주는 남도회화의 3대 축으로 자리 잡는다.
공재의 굳건한 선비정신과 실학을 바탕에 둔 과감한 사실주의와 실험정신이 담긴 그림은 녹우당에서 만날 수 있다. 또 공재가 수용한 남종화 화풍은 소치로 이어져 현재 호남화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남종화가 남도의 화단의 특징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그에 따른 연구와 전시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광주국립박물관도 소치와 김익로, 남농, 의재, 미산의 작품이 전시된 서화실을 따로 꾸려 호남지역 회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해남우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