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면 호교리 다리붕괴로 
여시가 둔갑해 사망했다 설

 

 1945년 9월 어느 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밤이었다. 문내면 선두리에 사는 주 씨,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주 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주 씨 집에는 모깃불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마당 한가운데 놓인 평상에선 친척들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담장 밖을 넘어가고 부엌 아낙네의 바쁜 손놀림을 보니 필시 이 집안에 큰 잔치가 벌어진 모양이다. 
이 집 주인인 주 씨가 내일이면 초대 해남경찰서장으로 부임하는 날이니 보통 잔치가 아니다.
당시 경찰서장 벼슬은 보통의 벼슬이 아니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조선 사람들에게는 꿈도 꾸지 못한 절대적인 자리였다. 조국의 해방이라는 국가 경사에 이어 집안의 경사가 겹쳤으니 온 동네가 잔치 분위기였다. 그런데 경사스러운 잔치에 내일이면 초대 경찰서장으로 부임할 당사자가 그날 밤 불렀던 노래가 상여소리였다. 축복의 노래가 아닌 상여소리, 얄궂은 운명의 서곡인지.
때는 1945년 해방 직후다. 일본이 물러가고 미군정이 들어서기 전 건국준비위원회가 해방정국을 장악하고 있을 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나라에 격변이 일어나면 가장 큰 문제가 치안이다. 
해남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에 시달리고 대동아 전쟁에 지칠 대로 지친 백의민족에게 찾아온 광복이지만 치안은 불안했다. 보복테러, 씨족싸움, 폭력배들의 난동 등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빈번했다. 미군정은 들어서기 무섭게 치안확보를 한다며 경찰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인격과 능력, 참신한 인물로 평가받은 주 씨를 초대 해남경찰서장으로 임명했다.
해남읍에서 서쪽방면 학동마을을 벗어나면 마산면 상등리 고개가 나온다. 상등리 두 갈래 고갯길에서 바로 직진하면 마산면 호교마을이다. 호교마을 앞에는 조그마한 교량이 위치했는데 주민들은 여시다리라고 일컬었다. 이 교량은 목재 다리로 수명이 다 돼 붕괴 직전이었지만 해방공간이라 보수할 여력이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다리이름도 여시다리인 데다 아슬아슬 붕괴위험까지 있어 다리 위 걷기를 무서워했다.   
잔치 다음날 주 씨는 초대 경찰서장으로 부임하기 위해 차량에 몸을 싣고 집에서 출발했다. 당시 해남경찰서는 해남군청 앞에 위치했고 경찰서장을 태운 차량은 여시다리로 불렀던 마산면 호교다리를 통과해야만 했다. 차량에는 운전수를 포함해 세사람, 이삿짐도 실려 있었다. 차량의 무게를 못 이겨서인지, 교량은 그만 차량을 끌어안고 무너져 버렸다. 
비운의 차량 운전기사는 이연옥이었고 뒷좌석에는 주 경찰서장, 그의 친구인 김 모씨가 동승해 있었다. 
운전기사 이연옥은 베테랑 운전기사로 만주 대련에서 택시기사로 활약하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동승한 초대 경찰서장과 그의 친구 김 모씨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김 모씨는 해남읍 읍내리 김종현의 장남으로 주 경찰서장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졸지에 집안의 장남을 잃은 김종현은 문벌을 자랑하는 순천김씨 집안에다 명사로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던 참봉영감이었다. 참봉영감은 장남을 잃은 후에도 3년간 하루가 멀다하고 아들 묘를 찾았다고 한다.
이 사고 후 교량의 명칭이 상서롭지 못하다는 여론이 비등해 교량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호교(狐橋), 다리 이름에 여우 호(狐)자가 들어가 있어 여시가 둔갑해 큰 사고가 발생했다는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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