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세계들의 알력싸움
홍광표 등, 최광율과의 알력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은 해남의 분위기는 다분히 들떠 있었다. 딱히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고나 할까.
너도나도 가만있질 못하고 밖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또 만나는 사람마다 친불친을 떠나 덥석 악수 아니면 포옹이었다. 이게 바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동포애였다. 

 그 해 8월25일경이다. 
구 성모병원, 지금의 토담식당 옆에 아담한 한옥 2층 기와집인 대흥여관 앞 도로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당시 열네살, 한참 호기심이 발동하는 소년기인 나도 부리나케 그곳으로 달려갔다. 현장에는 그 당시 주먹세계에서 널리 알려진 홍광표와 손부만이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골목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 공히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비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만취 상태에 누군가와 언쟁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여관 안에서는 연이어 고함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계속 들락거리고 있었다.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손부만의 친동생 손귀만이 긴장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났다.
손귀만, 그는 누구인가! 그는 해남만이 아니라 인근 군까지 알려진 칼잡이 아니던가. 그는 언제나 축구선수처럼 양발에 스타킹을 신고 스타킹 안에 단도를 숨기고 다닌다고 했다. 그는 황급히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더니 내 옆에 있는 방화수(당시 공습경보용)에 손을 쓱쓱 문질러 씻은 후 스타킹 안의 단도를 끄집어내 부리나케 여관 안으로 돌진해 갔다. 그러자 떠들썩하던 여관이 조용해지나 싶더니 그것도 잠깐, 또다시 고함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웃통을 홀랑 벗은 알몸뚱이 30대 사나이가 여관에서 뛰어나왔다. 그의 손에도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단도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저리 비켜! 이 새끼들아!” 꽥 소리 지르며 뛰쳐나온 청년의 험악한 기세에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앞다퉈 거리로 도망쳐 나왔다. 
거리로 나온 청년은 어느새 구름처럼 모여든 구경꾼들을 한번 쭉 훑어보더니만 칼을 든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며 “나는 최광율이다. 누구든지 덤벼라, 이 칼날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며 군중들을 뚫어져라 응시한채 방어자세로 뒷걸음쳤다. 
맨발에 웃통을 벗은 상태라 키는 작아 보였고, 근육질은 아니지만 어깨가 떡 벌어져 있어 그런대로 다부진 체격이었다. 그는 연신 경계를 하며 조심스레 한발 두발 뒷걸음쳤고 이에 보조를 맞춘 구경꾼들도 한발 두발 숨죽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해남경찰서 앞까지 오게 됐는데 경찰서 광장 한 모퉁이에는 10여 명의 왜경들이 집결해 있었다. 모두가 모자의 턱 끈을 내리고 어깨에는 총까지 메고 있었다. 앞으로 돌격! 하는 지휘관의 명령. 그런데 돌격 명령과 동시에 우슬재 하늘에 난데없는 비행기가 나타났다. 비행기는 낮게 해남 하늘을 날며 무엇인가를 떨치고 있었다. “야! 비행기다, 삐라다” 군중들은 저마다 두 팔을 휘저으며 삐라 붙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삼천만 동포여 일제의 만행은 끝났소, 삼천리강산에 해방의 종소리는 울려 퍼졌소. 우리는 자유를 찾았소. 모두 일어나 새 나라를 건설합시다” 등.

 그 사이 그 문제의 청년 최광율은 어디로 갔는지. 당시 싸움은 해남읍을 주름잡았던 주먹세계 사나이들과 새롭게 등장한 산이면 출신 최광율과의 알력싸움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름을 날린 최광율, 하늘에 나타난 비행기로 구사일생 도망친 그는 얼마 후 치안대 완장을 차고 다시 해남읍에 나타나 화제가 됐다. 새로운 주먹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던 기존 주막파들은 어느 날 최광율을 금강골 물이 떨어지는 곳으로 끌고 가 밑으로 굴러 떨어뜨리며 겁을 줬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홍광표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무사함을 알리는 등 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6·25 발발 후 산이면 호미부대 아주머니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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