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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하게 헤어지면 계속 친구로 남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라는 조건을 내걸었을 때 난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어. 그때 너는 유아를 애인으로 만든 후 결혼에 골인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었지. 미안한 얘기지만 유아는 널 사랑하지도 이성으로 생각지도 않았어. 유아의 마음속엔 옛 남자 친구와 내가 함께 자리하고 있어서 둘 빼고는 그 누구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거든.
명수와 제일이까지 그녀를 짝사랑하니 골치 아프더라. 네가 유아랑 사귀냐고 물었을 때 나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어. 궁극적으로 네가 상처 받고 내게서 멀어질까봐 그게 두려웠던 거야. 한편으로는 네가 이해할 수 없더라. 내 입장에선 진정한 친구라면 친구의 행복을 시기하지 않고 축복해줄 줄 알았어. 내가 그녀를 포기한들 그녀가 널 사랑할 확률은 0.000001 퍼센트도 되지 않을 텐데 말야.
그날 네가 명수와 불쑥 아파트에 찾아왔을 때 나와 유아는 함께 있었지. 눈치 챈 명수는 피식 웃었지만 진짜 창피하더라. 너에게 거짓말이 탄로 난 나는 18층 아파트 난간에서 뛰어내리고도 싶었지. 그 순간 너의 몸은 흡혈귀에게 피를 다 빨린 사람처럼 초췌해졌고, 멸치같이 생긴 너의 얼굴은 희멀건 석고상처럼 굳어버렸지. 단추 구멍만한 너의 눈동자에선 나에 대한 신뢰가 와장창 허물어지고 있었어.
너는 서둘러 명수와 잡다한 짐을 싼 후 극에 달한 질투심으로 우릴 째려봤지. 그것도 모자라 넌 내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욕인 것 같았어. 나는 허겁지겁 네게 변명해보려 주절댔지만 씨도 안 먹혔지. 너와 나의 관계는 믿음이 사라지자 애석하게도 마음이 굳게 닫혀버린 거지. 어렸을 적부터 꿈을 함께 먹고 자랐는데 진짜 남남이 되어버렸어.
너도 소식을 들어 알았겠지만 그 사건 후 석 달 만에 난 유아랑 헤어졌어. 내가 그녀를 찬 게 아니라 그녀가 날 찼어. 아프더라. 가슴을 도려낸 것처럼 극심한 그리움에 몹시도 떨어야 했어. 마치 완력이 강한 노동자가 내 심장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그 후 실연의 아픔을 딛고 사업에 열중했지. 한동안은 탄탄대로였지. 네가 기뻐서 펄쩍 뛸 소식은 2003년도에 내가 보란 듯이 파산했다는 거야. 길바닥에서 생선을 팔면서 혹은 자리싸움을 하면서 공중전화 박스에서 신문지를 덮고 자면서 현실은 한없이 삭막하고 소름끼치도록 무섭다는 것을 실감했지. 염치가 없었지만 어려울 때마다 널 생각했어. 친구야, 세상은 아흔아홉 가진 자가 백을 채우려고 하나 가진 자의 것마저 빼앗으려 든다는 것을 알았지. 상대에 대한 배려는 없었어.
그때 우리가 조금만 더 양보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서로에게 나눠줄 수 있었다면 관계는 지속되고 어긋나는 일은 없었을 테지. 내가 너의 섬세한 감성을 좀 더 이해하고 배려했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거야. 넌 나보다 더 유아를 사랑했던 거야. 철이 들어 돌이켜본다. 네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가슴이 메여와. 얼마나 아팠니? 네게 닥친 빗나간 사랑과 배신이 잉태한 고통을 무시해버려서 미안했다. 그래 많이 아팠지? 용서해라.
가끔 어린 후배들이 우정과 사랑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좋을지 묻곤 해. 이젠 대답할 수 있지. 그런 빌어먹을 상황이 오면 우정을 택하라고 명쾌하게 대답해주지. 친구야! 우린 과거에 이런 말을 주고 받아야했다. “누굴 선택 할 테냐? 유아냐, 나냐?” “너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 힘내라.” “아니다. 그녀는 널 사랑한 것 같더라. 축하한다.” 이렇게 말해주지 못했던 것을 너도, 나도, 평생을 두고 후회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린 친구였고 앞으로도 친구일 테니까.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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