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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증조할머니는 작은할머니다. 큰 증조할머니께서 아이를 낳지 못하셔서 증조할머니를 들이셨다고 한다. 내가 여섯 살 때까지 할머니집에서 살았으니까 어린 나를 증조할머니께서 키우셨다. 어릴 때는 증조할머니란 말이 잘 안돼서 ‘진주할머니’라고 불렀다. 돌아가신지 벌써 16년이 되었지만 어릴 때 느꼈던 증조할머니의 손길이 잊혀지질 않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돌아가셔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유복자 외아들을 키우셔야 했다. 그래서 억척으로 농사일을 하셨다. 할머니 손만 닿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농사일을 잘 하셨다. 그래서 쉴 새 없으셨던 할머니 대신 증조할머니께서 나를 키우셨다.
햇볕 쨍하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마루에서 증조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거나 대나무숲 바람소리를 듣다가 낮잠을 잤다. 이 장면이 너무 생생해서 요즘도 새소리만 들리는 아주 아주 조용한 봄날 한낮이면 자꾸 증조할머니 무릎이 그립고 그때 지나갔던 비행기소리도 들린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나무껍질 같은 손바닥이랑 쪼글쪼글한 종아리와 팔뚝살 같은 거였다. 손바닥은 내가 등 가렵다고 하면 손바닥으로 슬슬 문질러 주셨는데 그게 박박 긁는 것도 아닌데 가슬가슬하니 아주 시원했다. 그래서 가렵지 않아도 자꾸 긁어달라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릎에 누워있으면 증조할머니 팔뚝살이 눈에 들어오고 손이 자주 갔다. 작은 마름모꼴 주름들이 수도 없이 그려져 있는 갈색의, 쪼글쪼글하고 가죽만 남아서 늘어진 그 팔뚝살을 만지는 게 굉장히 재밌었다.
십리 거리의 선교원(유치원과 비슷함)을 다녀오면 “경외야~ 오늘 배운 창가 한자리 해봐라.” 이러신다. 경애를 꼭 경외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허리에 손 예쁘게 하고 노래를 종알종알 불렀다. 노래가 끝나면 “우리 경외 참말로 잘헌다.”하시면서 안아주셨다.
학교 들어간다고 엄마 따라 가버리자 참 많이 보고 싶으셨나보다. 가끔씩 할머니댁에 가면 정말 버선발로(증조할머니는 쪽 지으시고 한복을 입으셨다.) 토제에서 내려오셔서 “아이구 우리 갱아지들 왔능가? 어디 보세.” 이러시면서 우리 얼굴을 그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하나씩 하나씩 쓰다듬으셨다. 요즘엔 우리 시어머니께서 내 아이들을 그렇게 맞이해 주신다. 나도 나중에 손자들 오면 이렇게 따뜻하고 살갑게 맞아줄 것이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어릴 때 똥오줌 다 치마폭에다 받으실 정도로 나를 예뻐하셨다고 한다. 그리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도 할머니 임종 때에야 편찮으셨다는 걸 알았다. 대학 신입생 때라 정신이 없었다고 치더라도 어떻게 편찮으신 지조차 몰랐을까? 너무 죄송하다. 보고 싶으셨을 텐데…. 멀미 때문에 담양에서 광주집에도 못 오실 정도로 조선의 마지막 세대이신 증조할머니. 엄마가 모자나 조끼 떠다 드리면 “우리 손부, 곱게도 짰다. 잘 입어야제.” 하시던 증조할머니. 인정이 많으셔서 뭐든 이웃에게 나눠주시곤 했던 고운 우리 증조할머니. 팔순 넘어 고운 쪽 머리 잘라버려 내가 너무 안타까워했던 우리 증조할머니. 새하얀 머리랑 돌아가실 때 꺼내본, 시집올 때 입으셨다던 색 고운 원삼이 떠오른다.
엄마 대신이었던 우리 증조할머니가 가끔은 너무 보고 싶다.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난다.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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