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살 때 여기로 이사 오기 직전까지 동네 자그마한 마을문고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봉사활동을 했었다.
초가을이었던가. 빗줄기가 제법 세차게 내리는 오후, 한 여자 아이가 노란 우산을 들고 들어오면서 “선생님! 우리 엄마가요. 아침에요. 저 옆에 꽃가게 국화화분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화분이 없어졌어요.”하면서 울먹거린다.
그 아이의 맑은 눈망울과 엄마가 전부인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던지…. 난 두말할 것도 없이 “그래? 이리와 아줌마 업고 다시 가보자. 화분이 있나 없나.” 그 아이의 노란 우산을 받쳐들고 꽃집까지 가는 거리는 아주 짧은 거리였지만 기나 긴 행복의 거리였다.
아이랑 나랑 아이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 그 아이의 손에 든 동화책 한 줄에서 내 인생의 사고의 전환이 왔다. ‘그래서’라는 접속어에 실린 긍정의 힘을 손에 꽉 쥐었다. 이를테면, ‘나는 냄새 풀풀 나는 돼지를 기른다 그러나(그래도) 행복하다’가 아닌 ‘나는 냄새 풀풀 나는 돼지를 기른다 그래서 행복하다’
엊그제 나를 좋아하는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다른 친구를 빗대어 말했지만 왠지 나한테도 서운한 것이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전화를 끊고 문자를 보냈다. “숙아 너 나한테 화났지? 그래서 난 네가 좋아”하고 문자를 보냈는데, “시끄러.”하고 답이 왔다. 그 문자를 보고 피시시 웃었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통화 도중 “그래서 난 네가 좋더라. 그런 것들은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했더니 친구가 웃는다.
그래서일까. 우리 농장에 오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보면 참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인단다. 그러면서 그 강인함이 어디에서 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은 말을, 말은 행동을, 행동은 삶을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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