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그 여름엔 운동화는 없었다. 벗기보다 신기가 더 편했던 타이어표 검정고무신, 기차표도 있었고 말표도 있었다. 조금 산다는 집의 아이들은 흰고무신을 신기도 했다. 뒤축을 까서 뒤로 넘기면 슬리퍼 같은 삐딱구두가 되었고, 앞축까지 까서 개울에 띄우면 아주 근사한 배도 되었다. 운 좋게도 피라미 새끼 한 마리라도 잡으면 두 손으로 행여 떨어뜨릴 새라 고이 모셔 고무신에 담고 앞뒤로 손바닥만한 납작한 돌로 울타리를 만들고 다시 피라미를 사냥하고 오면 피라미는 어느새 폴짝 뛰어 탈출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시시해지면 고무신배 안에 돌멩이 하나 얹어 물길 따라 흘려보낸 후 그 배를 따라서 신나게 가다가 이끼 낀 돌에 미끄러져 무릎이 까지거나 옷을 버리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직 고무신에 물기가 남아서 질척거리면 얼른 펌프질한 수도꼭지에 대고 발과 신을 동시에 씻을 수 있는 유일한 신발, 그것은 고무신이었다.
여자아이들의 고무신은 흰색이든 검정색이든 새끼발가락쪽에 리본 문양이 있었지만 남자아이들은 아버지 것도 형 것도 내 것도 동생 것도 옆집 아재 것도 개똥이 아재 것도 다 똑 같은 재질에 디자인이며 신발 문수만 달랐다.
그래서 자기 걸 표시하기 위해 갖가지 자기만이 알 수 있는 표시들을 해야 했다. 어떤 신발은 쇠부지깽이에 불을 달궈서 구멍을 내기도 했고, 칼로 흠집을 내서 자기 성씨를 쓰기도 했고, OX 표시를 하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추석날 신어본 그 운동화의 촉감과 둔탁한 발자국소리와 땅바닥에 남은 선명한 발자국이 너무 신기해 자꾸만 걸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너무 좋아 혼자서 걷다보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행여 흙이라도 묻을까봐 발꿈치를 들고 걸었던 그 기억 또한 몸서리쳐지게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지금은 추억의 고무신으로 불리는 검정고무신 아직 내 시골집 마루 밑에 아버지가 가끔 신어보시던 그 신발이 남아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지그시 눈을 감고 타이어표 고무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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