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곳에 사는 사람은 달라졌어도 그 곳에 남겨진 추억은 그대로다. 오늘처럼 무덥던 여름날 이맘때면 점심 후 동네 사랑방에서 오수를 누리고서야 해질녘 깔(꼴) 바작을 지고 들로 산으로 향하던 시절이었다. 동네를 자주 들르던 엿장수가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상진이었다.
눈이 아주 나빴던 엿장수는 지남철(자석)을 가지고 다니면서 쇳덩이와 쇳덩이 아닌 것을 가늠할 정도였다. 우리는 동네 사장나무 그늘을(경로사상이었는지는 몰라도) 어른들에게 내어주고, 그저 동네 골목을 무대로 숨바꼭질 내지는 바꿈살이로 여름날을 보내던 참이었다.
그러다 할머니 머리카락이나 헌 고무신짝, 부러진 쟁기 보습이 있다면 걔는 우리들의 영웅이 되는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느 도회지에서 자식도 없이 사는, 평소에도 썩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거시기가 사랑방 툇마루에 앉아 우리를 부른다. 멀쩡한 자신의 흰고무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야, 이놈 갖고 가서 엿잔 사오니라 잉” 이게 웬 떡인가? 우리는 얼른 챙겨들고 엿장수를 향해 달렸고, 엿장수는 고무신을 받아 “들었다. 놨다”를 서너 번 하더니 엿판을 열어 제치고 탱! 탱! 탱! 엿을 잘라 준다. 우리는 그 엿을 들고 거시기에게로 갔고, 거시기와 또 다른 거시기들과 맛있게 먹었다.
엿장수는 다른 마을로 이동을 할 참이었을까? 동구 밖에 이를 즈음 거시기는 맨발로 엿장수를 향해 바람처럼 내달렸다. “어이! 상진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멈춰선 엿장수는 “뭔 일이여?” “아, 이자슥들이 낮잠 한 숨 자는 사이에 내 고무신을 갖다가 엿을 사묵어 부렀나벼.” 거시기는 다짜고짜 엿장수의 고물 바구니를 뒤졌고, 자신의 고무신을 찾아 들고는
“오메! 자껏, 그라믄 그라제, 요놈들이…. 내 신이 맞어.”하면서 고무신을 신고 유유히 동네로 향한다. 엿 먹은 우리는 어린 마음에도 ‘이건 아니다.’ 생각하지만, 어쩔 수는 없는 일. 엿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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