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해남의 역사가 목포대 사학과 학생들의 손으로 총정리됐다. 사학과 학생들은 10개월에 걸쳐 해남을 답사했고 그 결과물을 ‘한국의 하이난, 해남의 해양사를 탐구하다’라는 자료집으로 발간했다. 자료집에는 고대 마한시대부터 현재 이뤄지고 있는 어촌뉴딜 300사업까지 총 9개의 단락으로 정리했다. 목포대 학생들이 연구한 해남의 해양사를 9개의 단락으로 정리해 발표한다. - 편집자 주-
해남의 해양문화의 원동력은 고대부터 형성됐던 것으로 나타난다.
고대 해남의 해양문화의 중심지는 백포만 일대로 비정되며, 백포만 일대의 고대 포구세력은 시기에 따라 신미국, 침미다례, 탐라라는 명칭으로 문헌에 등장한다. 이에 백포만 포구세력의 발자취를 문헌별로 따라가면서 해남 해양문화의 원류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신미국’이라는 이름으로
백포만 포구세력은 ‘신미국’이란 이름으로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중국『진서』열전 장화조에 나오는 ‘동이마한 신미제국’이 그것이다. 동이와 마한은 막연한 종족명 혹은 지역명이라 할 수 있고, 신미제국이란 ‘신미의 여러 나라’라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곧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을 공유하는 세력집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신미국이 바로 백포만 포구세력으로 비정된다.
‘신미국’의 활동시기는 3~4세기이다. 신미국의 흔적은 송지면 군곡리 패총과 현산면 황산리 분토유적, 화산면 안호리 · 석호리 유적이다. 군곡리 패총지는 백포만 세력의 해양교류의 중심지로 기능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다양한 고고학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현산면 황산리 분토유적과 화산면 안호리·석호리 유적에서 발견되는 대규모 고분군은 신미국의 왕성한 활동상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신미국은 영산강유역의 여러 소국들과 함께 3세기 후반에 중국 진(晉)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1세기가량 반백제 성향을 띄며 백제와 대립했고 이러한 대립으로 4세기 후반에 백제의 무력공격을 불러 오게 된다.
백제에게 도륙당한 ‘침미다례’
동아시아 연안항로의 기항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신미국은 4세기 후반『일본서기』에 ‘침미다례’라는 이름으로 다시 확인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침미다례라는 신미국과 동일한 세력으로 보이며, 백제 근초고왕의 남방경략 과정에서 369년에 도륙을 당하는 등 큰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난다.
이후 백포만 포구세력은 친백제 세력으로 교체됐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흔적은 주로 현산면 일대에 남아있다. 당시 현산면 일대에 축조된 일평리산성, 고다산성, 백방산성이 대표적 흔적으로 백제가 이곳을 주요 해양 거점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현산초등학교 소장 토기를 보면 가야와 신라계 토기도 혼재돼 있는데 이는 백포만 세력이 백제 이외 가야 등과 교류도 지속하면서 독자적인 발전도 추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와 밀당한 ‘탐라’
근초고왕의 남방경략으로 친백제 세력으로 교체된 백포만 포구세력은, 5세기 들어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 세력이 약화되자, 다시 백제에 반하고 밀당하면서 독자 노선을 걸어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월송리 조산고분과 같은 왜계 고분은 백포만 포구세력이 백제가 아닌 왜와의 교류를 통해 정치적 독자성을 유지하려 했던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삼국사기』에 의하면 백포만 포구세력은 480년에 ‘탐라’라는 이름으로 백제에게 공부(貢賦)를 바친 것으로 나오고 있다. 480년의 시점은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이 함락당하자 웅진으로 천도했던 475년 시점에서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백제의 입장에서 백포만 포구세력의 공부(貢賦)는 큰 안도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러한 안도감은 백제가 탐라의 사자에게 제3품의 은솔이라는 파격적인 고위 관등을 내리는 것으로 표현됐다.
그러나 18년 뒤인 498년에 정반대의 기사가 등장한다. 즉 백포만 포구세력은 모종의 이유로 백제에게 공부를 바치지 않았고 이에 백제의 동성왕이 친정을 나서 백포만 포구세력(탐라)의 항복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밀당의 과정을 거쳐 백포만 세력은 백제에 편입돼 갔던 것으로 보인다.
‘신미국’, ‘침미다례’, ‘탐라’라는 이름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던 백포만 포구세력은 498년 이후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백포만 포구세력은 6세기에 들어 백제가 5방제를 실시하면서 새금현(塞琴縣)으로 편제돼 백제의 지방으로 편입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새금현은 통일신라시대에 침명현으로 개칭됐고, 고려시대에 해남현으로 다시 개칭됐으니, 백포만이야말로 해양문화로 상징되는 해남 정체성 형성의 뿌리가 아닐 수 없다.

목포대 사학과 학생 미래가 엄청 밝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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