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화원 신덕리 진흙 가마
해남 화원 신덕리 진흙 가마

 

9세기 장보고 세력 운영

화원면 사동리 인근에선 대략 100여 기의 ‘초기청자’ 가마터가 발견됐다. 이곳 가마터의 발생 시기에 대해 9세기 전반 발생설부터 12세기 초 발생설까지 제기됐고, 조성 세력에 대해서는 장보고, 견훤, 지방호족, 고려 왕실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필자는 9세기 전반 발생설과 장보고 운영설이 타당하다고 보아 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화원 ‘초기청자’의 발생 시기를 설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청자의 외형적인 모습이다. 화원 가마터에서 받침이 굵고 둥근 해무리굽 양식의 청자가 다수 출토됐는데, 비슷한 시기 중국의 월주요 청자 역시 해무리굽 양식을 취하고 있다. 중국 월주요에서 해무리굽 양식의 청자가 발생한 시점은 대략 8세기, 소멸시기가 9세기 후반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화원 ‘초기청자’의 생산 시점을 9세기 대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고 여겨진다. 
화원에서 ‘초기청자’가 생산되던 9세기 전반은 장보고가 완도 청해진을 근거로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름잡던 시기이다. 장보고는 화원에 대규모 청자 생산지를 조성해 주요 무역품으로 국내외에 보급했을 것이다. 더욱이 장보고 세력은 청자 소비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선종과 차의 도입에도 관계하고 있었다.

 

해남 화원 D지구 출토 해무리굽 다완
해남 화원 D지구 출토 해무리굽 다완

 

선종과 차, 청자와의 관계

화원 ‘초기청자’ 가마터가 운영되던 때 새로운 불교인 선종이 중국에서 국내로 들어왔다. 특히 선종 스님들은 차를 마시는 ‘음차 의식’을 통해 선을 수행했다. 따라서 선종의 도입과 확산은 곧 차의 소비 촉진에 영향을 끼쳤고, 차를 마시는 최고급 그릇인 청자의 소비도 촉진시켰을 것이다. 선종과 차의 유입, 차를 마시는 용기인 청자가 하나의 세트를 이루며 거의 동시에 중국에서 국내로 유입됐던 것이다. 
먼저 선종 스님들의 귀국 시점을 보면, 가지산문의 체징(840년), 봉림산문의 현욱(837년), 쌍계사의 혜소(830년) 등이 영산강의 회진포를 통해 귀국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선종 스님들이 귀국하기 시작한 9세기 전반은 장보고 세력이 청해진을 근거로 활동하던 시기(828~841년)다. 화원 ‘초기 청자’의 유력한 조성 세력으로 장보고 세력을 지목한 것은 이 때문이다. 
또 장보고가 국내에 발을 내딛던 828년에 김대렴이 차 종자를 중국 당으로부터 가져온 점도 의미심장하다. 차 종자의 도입은 자체 재배에 이어 차의 대량생산을 의미한다. 
장보고의 청해진 활동 시기 선종 및 차 수요의 확산이 일어났다면, 음차의 그릇인 청자의 수요 역시 폭증했을 것이고, 이에 장보고의 주도로 대규모 청자생산단지가 화원면에 조성됐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화원 ‘초기청자’ D지구 가마터에서 해무리굽 다완이 다량 발견됐다는 점은 차의 보급이 청자의 대량생산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국내 및 동아시아로 유통
 
장보고에 의해 청자 생산이 화원면에서 이뤄졌다고 한다면, 이는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청자를 생산한 셈이 된다. 
더욱이 화원에 조성된 ‘초기청자’ 생산 단지가 100여 기를 상회하는 대규모 단지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수요 이상의 잉여분 청자가 생산됐을 것이다. 이는 장보고 해상세력을 통해 청자가 국내 및 동아시아로 유통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청자 유통로로는 화원면 일성산 아래 고당 포구에서 금호만을 거쳐 화원면 끝머리 당포에 도달한 뒤 시하바다로 넘어가는 루트를 상정할 수 있다. 
고당 포구는 백제시기부터 중요한 현이 자리 잡았던 곳이며 영암 구림 도기를 비롯해 화원 및 산이 청자들이 무더기로 발견된 곳이다. 
또 당포는 영산강 하류에서 시하바다로 나가는 위치에 있던 포구로 당집을 의미하는 ‘당(堂)’과 당나라를 의미하는 ‘당(唐)’을 의미해 역시 활발한 해양 활동이 이뤄졌던 곳이다.
중국과 일본을 왕래했던 장보고 세력의 활동범위를 본다면, 화원 ‘초기 청자’는 국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로 유통됐을 가능성을 제시해 볼 수 있다. 
서남해를 기점으로 동아시아 바닷길에 관해서는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엔닌의 기록은 물론이고, 후대의 기록인 서긍의『고려도경』과 이중환의『택리지』를 통해서 살펴볼 수가 있다. 이 일대에 해상 교역로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비금도나 우이도 등 서남해 지역 해상 교역로 속에서 최치원의 도당(渡唐) 설화가 연쇄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아직 편년 자료가 부족한 추론의 단계이므로 유의할 필요는 있다. 차후 이에 대한 다양하고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지길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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