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량진 왜변의 발발
1555년 5월11일, 70여 척의 대규모 왜구 선단의 달량진 상륙으로 달량진 왜변은 시작됐다. 을묘년에 일어나 을묘왜변이라고도 한다. 그날 왜구는 빠르게 달량진에 상륙해 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 부사 한온을 죽이고 영암군수 이덕견을 포로로 생포했다. 당시 현장 전투에서 수장이 죽은 것은 지휘체계에 대혼란을 일으켰다.
달량진성을 유린한 왜구는 해남성으로 향했지만 해남 현감 변협과 남도포만호 송중기는 적은 군사로 해남성을 지켜냈다. 이후 왜구는 강진, 장흥을 차례대로 함락시켰고, 5월24일 영암 향교에 자리를 잡고 잡탕질을 이어갔다. 조선 정부는 달량진 왜변 발발 5일이 지나서야 이준경을 전라도 도순찰사에, 남치근을 전라좌도 방어사에, 그리고 김경석을 우도 방어사에 임명해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나섰다. 그리하여 5월24일 영암 전투에서 110여 명의 왜구를 참획하는 것으로 수습의 계기를 마련했다.
왜구는 후퇴하면서 강진 병영 군량과 연해안 지방에 대한 약탈을 계속하다 제주에 정박해 재정비하고자 했다. 그러자 제주 목사 김수문이 왜구를 급습해 54명을 베는 전과를 올리면서 달량진 왜변은 최종적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달량진 왜변으로 인한 피해는 엄청났다. 확인된 전사자와 피살자만 무려 510여 명에 달했다. 이러한 피해 충격에 빠진 조정은 이후 해양 방어 체계상의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왜변 후 비변사 설치
판옥선 중심의 군선체제
달량진 왜변은 국가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변방의 방어에 대비하는 ‘비변사’의 설치이다. 조선은 달량진 왜변을 계기로 비변사를 설치해 정식 상설관청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비변사는 의정부를 대신하는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 부상했으니, 이는 해남에서 벌어진 달량진 왜변이 가져온 국가적 차원의 커다란 변화라 할 수 있다.
달량진 왜변은 군대 운영 체계의 변화도 불러왔다. 요충지마다 진관을 설치해 독자적으로 적을 방어하는 체제인 ‘진관체제’에서 지정한 곳에 집결해 중앙에서 파견하는 지휘관이 통솔하는 ‘제승방략 체제’로 바뀐 것이다. 달량진 왜변 당시 도순찰사와 방어사로 나눠 파견하다보니 병사, 수사의 명령이 통일되지 않았기에 지역 자체 내에서 즉각 대응하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 제승방략 체제이다.
또한, 새로운 함선인 판옥선이 개발되면서 맹선 중심의 군선 체제에서 판옥선 중심의 군선 체제로 변화했다. 게다가 왜구와의 해전 경험으로 총통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주 무기로 총통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왜구를 막기 위해 재능있는 자를 서열에 상관없이 천거하도록해 이순신이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을 대비하는 결정적 대책이 강구된 셈이다.
이렇듯 달량진이라는 일개 지방에서 일어나 백성을 약탈한 왜구의 침략 사건은 결국 국가의 기틀을 바꾸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달량진 왜변 후
남창 제주도 출입소로 전환
달량진은 1555년 왜변으로 인해 성이 크게 파괴돼 폐진됐고 근처에 있던 이진진이 만호진으로 승격함에 따라 달량진은 이진진으로 통합됐다. 1872년에 그려진 고지도를 통해 달량진성의 달라진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달량진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보’의 형태(‘달량보’)로 19세기 후반까지 유지됐음을 알 수 있다.
달량진은 이후 유통경제를 활성화하는 포구의 기능으로 변신했다. 정조대에 육지와 도서를 연결하는 장시가 이곳에 들어섰다는 기록을 통해 유통경제가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남창(南倉)이 적혀있는데 이는 달량진에 머무는 사객을 지원하고 물량을 보관하기 위한 시설로 보인다. ‘남창’이라는 지명은 이로부터 비롯한다.
또한 ‘조선출입 후풍소(漕船出入 候風所)’, ‘해월루(海月樓)‚ 라는 표기도 있어, 달량이 제주로 향하는 배가 잠시 머물렀다 가는 후풍소(바람을 기다리는 곳)로 기능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달량은 제주도를 오가는 남해안의 대표적인 창구 가운데 하나로 활용된 것이다.
이렇듯 해남에서 벌어진 달량진 왜변을 통해 지방사의 흐름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달량진 왜변으로 인해 비변사를 설치하고, 판옥선을 개발하고, 군선 체제의 변화 등 국가적 차원의 변화와 해남 지역사회 차원의 변화를 불러왔다. 차후 역사적인 의미가 적지 않은 달량과 해남의 해양사적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