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다시 찾아온 위기
명량해전. 이순신의 결사적인 리더십과 명량의 좁은 해협 및 빠른 물살이 승리의 요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명량해전의 승리 요인 중 우수영이 가지고 있는 장점 역시 중요하게 작용했다. 명량해전이 벌어졌을 당시 우수영의 모습과 군사시설 등을 중심으로 서술하려 한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1593년 강화교섭이 진행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그러나 1597년 일본이 강화교섭을 깨고 재침략을 하게 되는데 그게 정유재란이다.
일본의 계략에 의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된다.
이순신이 없는 조선 수군은 7월15일 칠천량에서 궤멸한다. 칠천량해전의 참패로 조선수군은 재해권을 상실하고, 위기에 빠진 조선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이때 이순신에게는 궤멸된 조선수군을 재건해야 할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이순신의 수군 재건과정
이순신의 수군 재건과정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기 전부터 시작됐다. 7월18일 백의종군시기 이순신은 수군을 살피라는 권율의 지시를 받고 9명의 군관과 6명의 병사를 데리고 합천 초계를 출발한다. 수군 재건의 시작이다. 이후 이순신은 지금의 산청, 진주, 하동을 지나며 지역 인사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8월3일 진주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왕의 교지를 받았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즉시 전라도 방향으로 서진했다.
이순신은 당장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전력이 없었기에 무기, 전선, 군량미, 병력을 확충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순천지역을 지나면서 군관과 병력 60여 명이 합류했고, 보성에서는 군량미 600섬 확보, 동시에 병사들의 추가 합류로 120명 규모의 병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후 장흥 회진포에서 칠천량해전에서 도주한 배설의 배 12척을 인계받았다.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장흥에서 최소의 수군 재건에 성공한 이순신은 서둘러 해남으로 향했다. 그러나 해남 이진진에 도착한 이순신은 이곳에서 토사곽란으로 4일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후 병에서 회복한 이순신은 해남의 어란진으로 이동했고, 어란진에서 약 5일간 머문 뒤 진도 벽파진으로 옮겨 진영을 꾸렸다.
벽파진에 머무르던 중 9월7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50여 척의 일본 수군을 상대해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를 벽파진해전이라 부른다. 벽파진해전 후 이순신은 일본 대함대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우수영으로 진영을 옮겼다.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 이유에 대해 이순신은『난중일기』에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적었다.
명량은 최고 10~12노트의 매우 빠른 조류가 흐르는 곳이므로, 명량을 등지게 되면 마음대로 후퇴할 수 없게 되니, 퇴각로를 중시하는 이순신으로서는 벽파진은 좋은 싸움터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수영으로 진영을 옮긴 다음 날 이른 아침 일본군이 조류를 타고 명량을 넘어오면서 운명적인 해전이 시작됐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우수영을 거점 삼아, 12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군을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명량해전이다.
우수영의 전략적 우수성
그렇다면 이순신이 전투 직전 옮겨간 우수영은 어떤 곳일까? 첫 번째로 우수영의 지리적 위치를 들 수 있다. 우수영은 앞에 양도가 위치해 있어 명량해로에선 보이지 않는 은폐된 곳에 위치했고 또 우수영 앞 바다는 ‘ㄱ’ 모양으로 굽어져 있어 많은 배가 정박하기 좋았다.
두 번째로 양도가 방파제 역할을 해 울돌목의 빠른 물살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세 번째로 우수영에는 군사시설이 이미 갖추어진 상태였다는 점이다. 우수영은 군산의 옥구에 위치하고 있던 전라 수영이 세종 22년(1440)에 지금의 위치인 해남 황원곶으로 옮겨온 후 고종 때 폐진될 때까지 전라우도의 수군을 총괄하던 곳이었다. 때문에 배를 건조하고 수리할 수 있는 “선소”가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관방시설인 성곽도 잘 갖춰져 있었다. 이순신은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옮길 때 이러한 군사시설을 사전에 인지하고 이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우수영의 지리적 이점과 군사시설들은 명량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됐던 것이다. 이 점에서 해남의 우수영은 조선이 처했던 위기를 뒤바꾼 아주 중요한 장소로 기억돼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