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에 시작된 왜구의 침략과 삼별초 항쟁으로 신흥 조선은 섬과 바다의 중요성을 외면했고 또 이를 버리는 공도정책을 취했다. 섬과 바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짙었던 조선시대, 그러나 해남 윤씨가는 섬과 바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이를 적극 개척하는 실용적인 경제관을 가지고 있었다.
바다 개척했던 해남윤씨
해남윤씨가의 해양에 대한 인식은 간척사업에서 알 수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윤선도와 윤이후, 윤두서이다.
진도군 굴포리는 윤선도의 간척 활동과 관련한 설화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고, 주민들이 윤선도의 은혜를 기리고자 세운 사당도 있다. 그런데 1986년 삼별초 호국정신이 각광받는 시절에 윤선도의 사당에 삼별초 장군 배중손 장군이 영입되자,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암 윤이후는 윤선도의 손자이자 공재 윤두서의 생부이다. 윤이후는 55세 때 낙향한 후 1692년부터 화산면 죽도라는 섬에서 생활하며 섬을 직접 경영했다. 이에 대한 기록이「지암일기」에 남아있다. 지암일기에는 죽도 섬에 대한 묘사와 이름 유래, 지암이 교유했던 인사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기록에 의하면 죽도의 소유자는 창녕성씨 성준익이었는데 그는 해남윤씨가와 혼맥을 맺으면서 죽도 땅을 일임해 경영했다. 그러나 흉년으로 생계가 어렵게 되자 윤이후에게 땅을 넘겨준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는 1712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특히 그는 자신이 간척했던 현산면 백포(혹은 백야지) 마을에 애착이 커 이곳에서 생활했다. 또 그가 남긴 부채 그림인 <백포별서도>에는 공재가 생활하던 별서(별장)를 포함한 백포 마을의 전경이 그려져 있다. 공재 무덤 역시 백포 마을에 위치해 있다.
풍부한 경제력이 바탕
해남 윤씨가가 광범위한 간척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노비 노동력과 탄탄한 경제기반 덕분이었다. 그러나 해남 윤씨가는 집안의 노비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의 주민, 사찰의 승려, 그리고 승군까지도 간척에 동원했던 것이 윤이후의 지암일기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러한 내용을 놓고 해남윤씨가의 간척 활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진도 굴포리 사례를 봤을 때 해남 윤씨가의 간척 활동이 오늘날까지도 마을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기억으로 내려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해남윤씨가의 인물의 행적과 기록을 모은「당악문헌」에는 공재 윤두서의 간척 활동이 당시 힘든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해남윤씨가의 친해양도서 활동은 간척사업뿐 아니라 그들이 직접 섬이나 연안에서 생활했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윤선도 섬에 직접 거주
고산 윤선도는 51세에 완도 보길도에 입도해 자연 속의 삶을 이어갔다. 윤선도의 보길도 생활은「보길도지」에 잘 나타나 있다.「보길도지」는 윤선도가 세상을 뜬 지 77년 뒤 윤선도 5대손 윤위가 보길도를 방문해 쓴 기행문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산은 보길도의 부용동에 원림을 조성하고,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공부하고 시문을 나누는 삶을 영위했다. 또 보길도는 그의 자연에 대한 사상과 정신이 함축된 원림 조영의 완성지이자 해양문학 창작의 산실이었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남긴 세연정은 부용동 원림의 핵심으로 남아있고, 보길도 어부들의 삶을 우리말로 노래한 <어부사시사>는 해양문학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공재 윤두서도 해안가인 현산면 백포리에서 생활했다.
해남 윤씨가의 친도서해양적 인식은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중시조 윤효정은 호를 어초은(漁樵隱, 고기잡고 나무하는 은자)이라 했고 윤선도도 고산(孤山) 외에 해옹(海翁,바다의 늙은이)이라 칭했다.
개방적인 선구자 모습
섬과 바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조선시대에 해남 윤씨 가문이 오히려 도서해양에 대한 친화적 인식을 삶 속에서 유감없이 드러낸 것은 특이한 사례라 할 것이다. 해남 윤씨가의 대표 문인들은 그저 간척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직접 섬에서 삶을 영위하는 등의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조선 시기 양반사대부들의 섬과 바다에 대한 편견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자 했던 개방적인 선구자의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