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해상교역로 통해 중국으로부터 유입
천신제와 함께 공동체 유지에 중요기능

고대 해상교역로를 확인할 수 있는 복골은 해남 송지면 군곡리에 이어 가야, 일본, 등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고대 해상교역로를 확인할 수 있는 복골은 해남 송지면 군곡리에 이어 가야, 일본, 등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현산면 백포만과 삼산면 어성포, 계곡면 둔주포 등 바다와 이어진 만(灣, 육지로 쑥 들어온 바다의 부분)을 중심으로 촌락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농사를 지었던 이들에겐 바다보단 물이 많은 하천이 중요했다. 
따라서 이들은 만(灣)으로 이어진 삼산천과 화산 및 현산천, 계곡 및 옥천천 등에 둥지를 틀었다. 
청동기인들이 해남에서 번성을 누릴 때 철기로 무장한 중국 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에 낙랑군 및 대방군 등 한사군을 설치했다. 한사군의 설치로 철기문명이 해남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철기와 함께 온 것이 동물뼈로 점을 치는 복골이었다.
 

송지면 군곡리 출토(국립광주박물관)
송지면 군곡리 출토(국립광주박물관)

 

철기와 함께 유입

 철기의 보급으로 해남 하천가에서 각자의 세력을 형성했던 청동기인들은 하나의 연합체로 성장하는데 이 시기를 마한시대라 한다. 해남에는 54개 마한소국 중 하나인 신미국(침미다례)이 위치했고 이들은 해상교역을 통해 성장했다. 
 특히 신미국은 중국 및 가야, 일본을 연결하는 항로에 위치해 있던 백포만권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이때 가장 번성한 곳이 송지면 군곡리였다. 
 따라서 해상무역을 통해 번성을 누렸던 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항해의 안전이 었다. 
 해상도시였던 군곡리 마을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와 제례의식을 행했던 누각 건물이 서 있었다. 군곡리 해상세력들은 장거리 항해가 있을 때마다 신성한 공간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돼지뼈와 사슴뼈로 길흉을 점쳤다. 복골은 중국에서 신석기시대 성행했던 의 례행위이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유행했던 복 골문화가 낙랑 등 중국 한사군을 통해 군곡리 에 전해된 것이다.
 당시 군곡리 해상도시는 풍부한 먹거리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다. 산에는 사슴과 멧돼지가 넘쳐났고 바다는 각종 패류와 물고기가 넘쳤다. 
이들은 수렵활동을 통해 사슴과 멧돼지를  잡아먹었는데 군곡리 발굴조사에서 가장 많 이 나오는 동물 뼈도 사슴에 이어 멧돼지 뼈 였다.
 이들은 수렵을 통해 잡은 멧돼지와 사슴의 어깨뼈를 점을 치는 도구로 사용했다. 처음에 는 주로 돼지뼈를 사용하다 이후엔 사슴뼈를 복골로 이용했다. 특히 중대형 동물 어깨뼈는 비교적 얇고 넓어 점복행위를 하는데 용이했다.  

복골, 고대 해상루트 가늠
 

광주 신창동 출토(국립광주박물관)
광주 신창동 출토(국립광주박물관)

 

 군곡리에서 출토된 복골에 관심을 갖는 것 은 복골을 통해 당시의 고대 항해루트를 추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복골은 경상남도 사천과 김해 해현동 폐총지 등 가야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고 송지면 군곡리에 이어 일본 규수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또 해상을 통해 군곡리로 유입된 복골은 강을 통해 육지로 전파됐는데 대표적인 곳이 영산강 줄기에 위치한 광주 신창동이다. 우리나라에 복골이 최초 유입된 곳은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유적지로 알려진 함경북도 무산 호곡동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철기시대 초기 송지면 군곡리와 경상남도 사천 늑도패총지로 유입 된 후 본격적으로 복골행위가 이뤄졌다.

항해 앞두고 복골점
 

경남 김해 회현리 출토(국립김해박물관)
경남 김해 회현리 출토(국립김해박물관)

 

 고대사회는 자연현상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이 컸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로 인해 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길흉을 점치는 특수한 계급이 출현했다. 이들은 하늘과 인간을 연계하는 역할로 사회를 이끄는 중심자적 위치를 점유했다. 군곡리에서 복골로 점을 치거나 하늘에 제를 지낸 이도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특히 점을 치는 사람은 장거리 항해나 그해의 풍어, 국가적 제사와 함께 정기적으로 의례 행위를 주관했다. 
 이러한 의례행위를 통해 집권자의 권위는 강화됐고 또 집단의 결속도 강화됐다. 복골행위가 신을 대신하는 도구이자 집단을 지배하는 행위로서 역할을 한 것이다.
송지면 군곡리는 해상교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다. 따라서 군곡리 사람들에겐 그 무엇보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의식이 중요했 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마한조에 ‘각 나라에는 별읍이 있는데 이를 ‘소도’라 하며, 그곳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 그 지역으로 도망 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않아서 도둑질을 좋아하게 됐다’ 라는 기록이 전한다. 
군곡리의 제례공간이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나오는 소도 관련 별읍이라면 이곳은 우리나라 첫 소도 확인지이자 가장 오래된 항해 관련 제사의례터로 기록되게 된다. 

제의식 가장 중요한 행위

 송지면 군곡리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다. 이후 철기시대인 마한시대 들어 마한 54개 소국 중 하나인 신미국이 백포만권을 중심으로 성장해 해남 곳곳에 분포돼 있던 청동기 세력들을 통합했다. 그때 중심도시는 송지면 군곡리였다.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송지면 군곡리는 마한시대 들어 더 많은 집들이 들어 서지만 마을의 최정상에는 집을 짓지 않았다. 신에게 제사를 지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청동기부터 마한시대, 백제 통치시기도 마찬가지다. 
 군곡리 해상세력들은 중국 및 왜와 장거리 해상무역을 전개했다. 당시는 썰물과 밀물, 바람 방향을 이용해 항해를 했기에 중간 기착지인 군곡리에 오면 많은 체류기간이 필요했다. 군곡리에는 솟대도 세워져 있었다. 솟대 위에는 신과 인간을 이어지는 새가 조각돼 있었다. 제의식은 씨를 뿌리는 5월과 수확철인 10월에도 거행했다.
 복골은 동물의 뼈에 불을 지져 금이 가는 현상을 놓고 길흉을 점치는 행위이다. 즉 거북이나 짐승뼈를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에 못 이겨 좌우로 터지는데, 그 터지는 문
양을 보고 길흉을 판단했다. 한자의 ‘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상형문자이다.   또 동물 뼈를 불로 지지기 전 뼈에 구멍을 내기도 했지만 송지면 군곡리에서 출토된 복골은 구멍 파기를 하지 않고 불만 지진 것으로 나타났다. 동물 어깨뼈를 이용한 복골은 기존의 제정 일치사회가 신권정치사회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천신제와 점을 전문적으로 치는 점복인이 있었던 것이다.
 복골은 중국 동전인 화천과 함께 중국과의 교류를 의미하는데 우리나라에선 김해 봉황동 유적과 사천 늑도, 통영,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와 광주 신창동 등에서 수습됐다. 또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지와 김해 부원동 유적, 부산 조도 패총, 창원 남산 유적, 김해 봉황대 유적, 부산 동래 낙민동, 보성 척령리 금평패총 등지에서 복골이 수습돼 복골이 바다를 통해 유통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영자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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